돌로써 풀을 누르듯 어리석은 일

다만 살생과 도적과 간음과 망어가 성품으로 좇아 일어남을 자세히 관하면, 일어나되 곧 일어남이 없는지라 당처가 문득 고요하나니 어찌 반드시 다시 끊으리오. (수심결 24장 중)

보조국사는 앞서 불성(마음)은 작용하는 데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어느 왕이 아주 맛있는 차를 마신 일이 있었다. 후일 다시 그 차 맛이 생각나서 신하들에게 그 ‘차 맛’을 다시 가져오라고 하자 신하들이 다시 그 차를 우려서 진상하였다. 차를 맛본 왕은 그 때의 맛이 아니라며 ‘차’가 아니라 ‘그때의 차 맛’을 가져오라고 재차 명령했다 한다.

맛을 느낀다는 것은 차를 마시고 이를 감지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일정한 ‘그 맛’이 존재하여 언제고 다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훌륭한 거문고 소리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후일 다시 그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어 그 연주자를 찾아 다시 그 거문고 연주 소리를 들었지만 그 때의 소리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의 소리를 들려달라고 했다지만 어찌 다시 그 소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어디 입으로 느끼는 맛과 귀로 듣는 소리뿐이겠는가? 우리의 모든 의식 작용은 이와 같이 그때그때의 마음 작용일 뿐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이지만 마음을 닦는데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어떠한 기쁨이나 슬픔, 또는 두려움이나 화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마음을 없애려고 억지로 참고 견디는 것은 잡초를 제거하고자 돌로써 풀을 누르듯 어리석은 일이다.

‘아하, 시험을 맞이하여 낮은 점수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시험을 잘 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구나.’ 이와 같이 성품으로부터 경계를 당하여 각종의 마음이 일어남을 잘 살펴봄으로써 그 일어난 마음의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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