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100년 특집 ┃ 이웃종교 100년에서 배운다 1 - 불교

▲ 아래는 금강산 표훈사 전경, 위는 6세기 중국 북위시대에 제작된 불두
▲ ■ 일본 신종교 / 창가학회
원불교 100년 특집 ┃ 이웃종교 100년에서 배운다 1 - 불교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 소화해야

다각적 교리 해석과 비판적 연구 허용할 수 있나?




개교 100년을 8년 앞두고 있는 원불교. 교단 구석구석에서는 ‘원불교 100년’을 화두삼아 공부와 사업 등 모든 면에서 원불교가 개교 100년대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교문을 열었던 1, 2세대의 열반 후 사회속에 안착해 가는 과정을 겪었다. <원불교신문>에서는 이 점에 주목해 이웃종교들의 100년 경을 살펴보기로 했다. ‘원불교 100년’의 타산지석을 삼기 위함이다.

이번 호는 일본에서 불교학을 전공한 뒤 원광대 사상연구원과 동국대 불교연구원에서 활발한 연구를 주도하는 원익선 교무가 불교를 살핀다.

잘 알다시피 불교가 한국에 상륙하기까지는 인도에서 발생해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미 수백 년에 걸친 지역전파의 역사를 통해 국제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국제성은 부처님 멸후 약 100년에서 500년 사이에 불교 내에서 일어났던 갈등과 변혁의 일대과정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원불교는 여기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초기불교의 근본분열=부처님이 멸하신 후 100여년이 지나 처음으로 일어났던 불교의 분열을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그 원인을 남전과 북전은 달리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남전의 기술에 신빙성을 더 두고 있다. 이에 의하면 불멸 후에도 통일을 유지해 왔던 승가가 대중부(?衆部)와 상좌부(上座部)로 분열된 원인은 바이샬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전통적인 계율을 완화시킨 십사(十事)를 정법으로 해석한 것과는 달리 장로 비구들은 비법이라고 주장한 데서 찾고 있다. 십사의 내용 가운데서도 마지막 조항인 ‘금은정(金銀?), 즉 금은이나 돈을 소유하거나 저축하여도 합법적이다’라고 하는 데에 논쟁의 핵심이 있었다.

700여명의 비구들이 모여 논의했는데 결국 밧지족 비구들의 주장은 각하되었고 비법으로 판정되었다. 여기에 굴복하지 않은 다수의 진보적인 비구들은 회합을 하여 스스로 대중부라고 칭하게 되었고 이에 반해 보수적인 장로들의 집단은 상좌부로 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조는 이미 1차 결집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를 둘러싼 가섭과 아난에 관한 전승은 부처님 당시의 계율에 관한 논쟁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문제일의 아난은 부처님의 열반 직전 중요하지 않은 계율들 몇몇은 페기해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것에 대해 가섭은 그 범위를 모르므로 다 결집에 넣을 것을 주장해 승인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여타의 문제와 더불어 아난을 집단적으로 비난하게 되었다는 전승이다. 이는 율장편집에서 교단 내의 엄격주의와 온건주의 사이의 분열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십사의 문제 제기는 서방출신의 장로비구였던 야사가 당시의 상업도시였던 바이샬리에서 비구들이 신도들로부터 금은으로 보시받는 것을 보고 제기한 것에서 출발했다. 당시의 바이샬리는 경제활동에 의한 화폐의 거래가 왕성하여 승려들이 물건대신 이를 받았던 것이다. 현실적인 상황을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불교의 발전에 따라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 회합을 계기로 700결집이라고 하는 제2결집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북전의 분열설은 아라한의 경지에 대한 의견의 차이라고 보고 있는데 대중구제와 유리된 당시의 아라한 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교세의 확장과 이에 따른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부파불교의 시대=이 근본분열로 인해 또 다른 많은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를 부파분열이라고 한다. 이 또한 남전과 북전은 달리 기술하고 있다. 북전만을 본다면 불멸 100년 후부터 대중부로부터는 본말 합쳐서 9부로, 상좌부로부터는 불멸 후 400여년이 지날 때까지 11부가 분열되었는데 이를 합쳐 북전의 전통에서는 소승20부라고 부른다. 이러한 남북전의 전승들을 포함해 각부파의 세력분포에 대해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술이 산재해 있어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근본분열 이후 부파분열이 우후죽순처럼 이루어졌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 시대의 의미는 부파불교의 논사들을 통한 아비달마 불교의 시대를 열었다는 데에 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을 다르마라고 하고 이를 이해하는 제자들의 지혜를 아비다르마(abhidharma)라고 하는데 이를 정리한 논 또는 논서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를 모은 것을 논장(論藏)이라고 하여 율장과 경장을 합하여 삼장이라고 하였다. 부파에 따라서는 이러한 논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정각 때 얻은 법이 제자들에게 전해졌으므로 부처님의 설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이 아비다르마는 대체로 불멸 후 300년에서 500년까지의 논사들의 단계적인 노력을 통해 축척되었다. 아비다르마 문헌들이 형성된 것은 부처님의 교설 가운데 불확실한 문제들에 대한 규명을 위해 승려들의 문답을 통한 주석의 과정 혹은 초기경전에 사용된 개념의 정리나 종합적인 분류를 통해 발전되었다고 보고 있다. 상좌부로부터 분파된 설일체유부의 논장의 대집성으로 유명한 , <대비바사론>은 이러한 결실로 대승불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뛰어난 논사들을 배출함과 동시에 이들로 인해 불교교학을 풍요롭게 만든 아(我), 법, 인과, 업, 연기, 윤회, 열반 등의 문제에 관한 다양한 논쟁이 이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종교의 교의는 사상과 철학의 원천이며, 이에 따라 학문적인 토론과 비판은 종교 내적성장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아비다르마 시대의 이성과 통찰을 통한 교학의 성장은 불교의 보다 세계적인 전파를 위한 예비된 과정이었던 것이다.



■ 대승불교의 길=승원에 정착하여 왕족이나 부호의 경제적 지원을 기반으로 학문이나 명상에 전심하던 초기불교에 대항하여 불멸 후 5∼600년경에 자기 자신을 보살 혹은 자신의 입장을 대승이라고 부르며 성불을 목표로 하는 혁신적인 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기원을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탑의 건설과 공양을 맡은 재가신자 집단으로부터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여기에 부파불교의 교의를 빌린 지도자적인 출가 승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소승적인 부파불교를 극복했다고 보나 대중부의 진보성과 이의 부파인 설출세부에 의한 부처의 초월적 성격과 그 외 부파불교의 교학적인 논의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승불교로의 변화는 보살도의 출현, 보편적인 진리로써 법신불 사상의 강조, 공사상의 확립, 다양한 부처의 존재를 인정하는 시방불의 출현, 이에 따른 신앙의 강조와 같은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흥기는 다음과 같은 변화와 더불어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첫째는 다양한 경전의 편집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기원후 1세기경부터 이루어진 대승경전의 편찬은 공사상을 반영한 반야경을 비롯 유일한 재가중심의 경전인 유마경, 후에 천태의 소의경전이 된 법화경, 선종의 주요경전인 화엄경, 정토사상의 핵심인 무량수경 등이 이루어졌고, 이후 7세기에 이르기까지 용수의 중론을 비롯, 여래장 경전류, 유가행파의 경전류, 밀교계의 경전 등이 무수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전류는 비록 위경적인 요소가 두렷하지만 주체적인 체험과 깨달음의 내용을 중심으로 발달과정에서 주변의 다른 사상과 문화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인간적 완성과 진리의 보편성 확립을 지향하고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둘째는 불상의 성립이다. 불상의 발전은 법등명 자등명을 강조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드러나 있듯이 금기시된 것으로 보이나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발전에 따라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이 또한 불멸 후 500년경 기원후 1세기경에 서방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에서 그리고 인도 독자적인 경향을 띤 마투라라고 하는 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인도 서북부의 이민족 침입과 헬레니즘과 페르시아의 문화 유입과 관련이 있다. 아무튼 불상의 발견은 이후 그 시대와 지역 문화의 섭취를 가져다주어 건축, 미술, 조각, 음악, 의례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문화적 상상력의 흡수는 국제화와 더불어 종교성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이 외에도 대승불교의 발전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불교신앙을 확대시키면서 민중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한 정토사상의 발전과 6바라밀로 대표되는 이타적 보살행의 대사회적인 실천행 등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렇게 대승불교로 발전하기까지의 초기불교를 개괄적으로 살펴 보았다. 원기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처럼 과연 진보와 보수의 입장과도 같이 교단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교조의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용인할 수 있으며, 또한 비판을 전제로 하는 학문적인 자유를 마음껏 허용하는 동시에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야 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는 세계적인 종교가 거쳐야만 했던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원익선 전문기자 won-yosa@hanmail.net





■ 일본 신종교 / 창가학회

일본사회 기존 교단 능가하는 영향력

불교에 연원대고
조직적 체계와 유연성
교화대상 효과적 공략




일본의 신종교는 일반적으로 19세기 중후반부터 태생한 종교들을 일컫는다. 이 가운데 현재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신종교는 공교롭게도 1930년대에 창립된 창가학회, 입정교성회, 영우회로 법화경을 신앙하는 재가불교교단이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수백만의 신자를 거느리며 일본사회에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존의 교단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 중에서도 1700만의 신도를 가진 창가학회의 발전과정을 눈 여겨 보기로 한다.

창가학회는 마키구치 츠네사부로와 토다 죠세이에 의해 1930년에 창가교육학회로부터 시작, 패전 후인 1946년에 창가학회로 개칭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4년에는 정치단체인 공명당을 설립하여 일본 정계의 핵으로 등장한 후 현재는 여당과의 연립정권을 이루고 있다. 교리는 일본중세에 일련(日蓮) 스님에 의해 고양된 법화경의 사상을 근대적 교학으로 체계화한 일련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근대 서양철학의 가치론위에 현대적인 생명론을 가미한 해석방법을 취하고 있다. 창가학회의 발전요인을 분석해 보자면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 불교계에 보편화된 말법사상에 기반하여 법화경의 말씀을 정통으로 보는 법화중심 사상의 계승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천태사상에 연원한 법화계 종단을 정토계통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다이모쿠(題目)라고 부르는 ‘나무묘법연화경’을 독송하는 신앙과 수행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정토종처럼 말법 의식에 바탕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후 극락세계를 매개로 하는 정토종계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며 법화일승사상으로의 귀일을 강조하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상적 계승 위에 무엇보다도 독립된 종교로 나서는 것보다도 자신의 정통성을 과거의 토착화된 불교에 연원지웠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키구치 츠네사부로는 전통교파의 하나인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신자이기도 했는데 이 교파는 일련 스님을 본불(本佛)로 보고 그의 교학을 정법으로 하여 법화귀일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계승한 것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의 정신문화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교화대상의 공략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창가학회는 5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는데, 주로 학생, 가정주부, 지식인, 직장인 등의 중간층 서민들을 신자로 확보하는 동시에 중간조직으로서의 영세경영자와 신중산층이 저소득층을 이끌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공명당이 당시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대 세력속에서 제3의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수정자본주의적인 입장에서 독점자본을 용인하고 그 대신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한 대중복지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한 것에 있다. 창가학회의 정치진출은 왕불명합(?佛冥合, 일련주의에 바탕한 것으로 불법과 국가의 일치주의)에 의한 것인데 교리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여기에 절복(折伏, 악한 사람은 악한 심성을 꺾어 굴복시키는 것, 선한 자는 선을 통해 인도한다는 섭수(攝受)와 대비되는 개념이다)이라고 하는 공격적인 포교방법을 택하고 있는데 이러한 면도 교도확보에 일익이 되었다. 아무튼 근대사회에서 산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이 극심한 서민 대중을 적절하게 포교의 대상으로 설정, 성공했다는 점과 창가학회 나름의 교리를 확고한 실천적 의지를 통해 현실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교단 조직의 체계화와 유연성이다. 사실 창가학회의 근간인 일련주의는 패망 전에는 천황주의와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50년대에 들어서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당시 회장이었던 토다 죠세이는 독자적인 교학의 확립과 조직의 재편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교리의 실천을 위한 전위부대로 회장직속의 청년부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세이익과 현실문제 타파를 내걸고 서민층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60년대에는 청년부 출신의 이케다 타이사쿠(池田?作)가 토다 죠세이의 뒤를 이어 강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약 2백 50만 정도의 안정된 교세를 기반으로 해외포교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70년대 초에는 포교활동을법화의 대지에 전개하는 대문화운동으로 규정하여 교의와 조직의 대개편을 신속하게 주도하였다. 또한 불법민주주의를 내걸었던 공명당과의 정교분리를 천명한 후, 교육, 문화활동, 국제교류, 평화운동을 통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과거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면은 일본의 다른 신종교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종교도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흥망성쇠하는 생물학적인 존재임을 창가학회의 지도자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원익선 전문기자 won-yo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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