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잔디의 해충 방제를 위해 총부 종법실 앞의 정원 잔디를 불태운 적이 있었다. 잔디를 태우는 불 구경은 재미있었고 마른 잔디에 붙인 불인지라 눈 깜짝할 사이에 잔디는 새까맣게 재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아직 잔디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고 있는 가운데 선진님께서 지나시다가 이를 보시고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다.

교단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날 눈물이 쏙 빠지게 나무라주신 선진님의 경책을 잊을 수 없다. 수많은 미물곤충들을 살생한 과보를 너희들이 어찌 다 받으려고 하느냐는 꾸짖음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선진님께서는 쥐약을 놓으면서도 도량 구석구석을 목탁을 치고 다니시면서 서생원에게 알렸다고 하니 그날의 꾸짖음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지난 10월 10일 언론회관에서는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선포식’이 있었다.

이날 행사에 원불교 대표도 참석하였지만,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사형수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사형 집행이 1건도 없었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적으로는 사형제도가 존재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1997년 12월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후 1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기에 금년 말이 되면 우리도 ‘사실상 사형제도 폐지국’에 들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국가권력이라는 이름으로 66개 나라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

사형제도 폐지운동은 인간생명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인간 개개인의 생명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이유로도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살생을 금하라고 한다. 종교의 생명존중은 비단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똑 같이 적용되고 있다.

대종사의 가르침도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삶을 영위하는 근거가 사은이기 때문에 만생명이 곧 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반성해보아야 할 일은 인간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미물 곤충의 생명까지도 존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체득하고 실천하려면 만생령이 나와 하나라는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형제도 폐지나 전쟁을 반대하는 거창한 운동도 중요하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인류평화의 출발점이 된다.

잔디 속에서 타죽은 미물 곤충의 생명을 당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아셨던 선진님의 자비에 내가 미치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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