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양현수 교무, 김정용 원로교무, 송경은 교도.
올해는 주산 송도성 종사의 탄생 1백주년이다. 11월3일 주산종사 1백주년을 맞는 추모 사업이 진행 된다. 이를 앞두고 <원불교신문>은 주산종사에 대한 추모 존숭의 뜻으로 생애와 사상에 이어 좌담을 연재한다.



좌담자는...

주산종사에 대한 좌담은 17일 본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좌담자는 주산종사를 친견하고 직접 지도받은 김정용 원로교무(전 원광대 총장), 주산종사 문집 편집위원장인 양현수 교무(원광대·일본교구장), 주산종사의 3남인 송경은 교도(신림교당·전 휘경여중 교장)이다. 사회는 본사 육관응 편집국장이 맡았다.



김정용 원로교무 “교단미래 계획한 천재적 성자”

양현수 교무 “전재동포구호사업 지휘한 실천적 활불”

송경은 교도 “원친회·원광대·청년회 설립개척자”



사회=주산종사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먼저 시작하실까요?

김정용
=공자의 제자 가운데 안자는 바람이나 구름과 같고, 맹자는 태산엄악과 같다고 한다. 유가에 비견해 보면 정산종사님은 뵈면 정이 가고 자애로우셔서 안자에 비견되고, 주산종사님은 곧고 바르셔서 맹자에 비견된다.

단추하나, 옷깃하나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문 하나 여시는 것도 가만히 여시는 등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절도와 질서에 맞으셨다.

그런가하면 법도에 맞는 자애로운 인품도 가지셨다. 제가 원불교에 와서 회초리를 맞은 분은 주산종사님 밖에 없지만 후에 반드시 교훈을 주시고 기분을 풀어주셨다.

송경은=5살 때 아버님(주산종사)이 열반 하셔서 기억이 없지만, 집에 오시면 어린 저를 무릎에 앉히시고 다리를 흔들어 주셨다. 엄정하셨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었지만 또 인연들에게 자주 편지하시고, 후진들을 세세하게 챙기시고, 인간적인 유대관계도 돈독히 하시는 등 다정다감한 면도 보이셨다. 고산 이운권 종사께서 하신 추모담을 보면 능엄경과 맹자를 자주 보셨다고 한다. 심성은 부처님, 기상은 맹자를 닮고자 하신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양현수=교단의 역사 속에서 보면 청년 지도자상으로 우뚝 서 계신다. 장수로 보면 지장과 덕장을 겸하고 있다. 용장이면서도 시심(詩心)을 가지고 있어 모두와 어울리기도 하시는 분이다. 원(願)과 행(行)이 투철하신 분이다.

문집과 글을 정리하면서 보이는 주산종사님의 특징은, 모두가 나만 챙겨주신 것 같고 교훈을 주셨다고 말할 정도로 인연된 모든 분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분이셨다.



사회=원친회의 모태가 된 유년회 조직은 물론 야학 실시와 금강청년단 등 청소년과 청년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시사하는 바는?

김정용
=주산종사는 교단의 장래를 내다보며 ‘인재양성’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다. 그래서 오늘날 원친회가 된 총부의 유년회(=자공회)를 결성하고, 원광대의 모태가 된 유일학림도 추진하고, 금강청년단 등 미래의 주인을 만드신 분이다. 총부에서 강연대회(1942)가 있어 (교육을 위해) 직접 원고를 써주신 일이 있는데 원고를 외우게 한 뒤 억양과 제스쳐까지 가르쳐 주셨다. 결국 주산종사께서 연출하신 것이지만 이 일로 대종사님께 10갑을 받았다. 한마디로 주산종사는 교단 미래의 계획과 경영, 육영 등과 예술 덕행을 구비하신 천재적 성자이시다.

양현수=일제 말 대종사 열반(1943)은 더할 나위 없었을 것, 해방후 주산종사가 열반하자 그 유훈을 따라 금강단을 만들게 했다. 실천으로 보여주시면서 따르게 했는데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어른이다. 자비덕행과 강직함을 두루 갖춘 ‘활불’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송경은=업적 가운데 인재양성에 대한 공적이 크신 것 같다. 주산종사는 인재양성은 어려서부터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신 것 같다. 그래서 보육원 설립이나 유일학림 설립과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우리 기관에서 교육을 받던 어린 아이하나가 길에 떨어진 복숭아를 안주워 먹자 그 아버지가 감동한 일이 있다. 어릴 때 심성을 가르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휘경중학교에 봉직(교장)하면서 유년과 청소년기의 교육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전재동포구호사업을 비롯해 보육원 설립과 문명퇴치운동 등 대사회적 활동에 주력한 까닭은?

김정용
=동포들이 일제치하에서 외국에 머물다 해방된 뒤 고국으로 찾아오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 열악했다. 그 분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 전재동포구호사업이었다. 익산에서는 주먹밥을 가득 실은 5∼6대의 리어커를 시시때때로 끌고 가 기차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서울과 부산에서도 했었다. 다른 종교에 비할 바가 없이 원불교가 대표적으로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구호미로 지은 주먹밥을 전재동포들에게 전해주었고, 진두지휘를 한 것이 주산종사였다.

약관 20세 때는 경성지부 교무로 나가면서 후진들에게 개척교화를 당부했다. 개척정신이 아주 강하신 분이다.

양현수=전재동포구호사업을 비롯해 자공회, 보육원, 유일학림 등 교단의 모든 시초를 보면 주산종사가 계셨다. 교세를 키우기 위함보다는 불보살로서 차마 두고 볼 수 없다는 심정이 강하셨던 것 같다. 또 서울역에서 당신이 직접 진두지휘 하셔서 이 사업이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교세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셨다.

1945∼48년 건국기간은 무법천지였다. 그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정산종사께서 건국론을 내셨고, 동포의 어려운 삶 속에 뛰어 들어가 품으셨던 것이 주산종사의 사업이었다. 그 이념과 실천적인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송경은=전제동포구호사업을 하면서 군정에서 나온 물품이 다른 단체와 달리 하나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오롯이 사용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교단이 인정받았고, 후일 우리 교단의 전통이 된 것 같다.



사회=신앙·수행적 측면도 살펴 볼까요?

김정용
=우리 교단에 대각여래위가 4분이시다. 3대 주법과 더불어 주산종사가 그 분이다. 13세 때 대종사 제자로 입문하며 ‘마음이 지극히 넓고 큰 것이니 정신 수련으로 그 마음을 확충하려 하나이다’고 하자 이름을 큰 도를 이루라는 뜻에서 도성(道成)으로 주셨는데 그것이 견성 인가라고 본다. 그리고 선시를 참으로 즐겨 보셨다.

양현수=대종사님의 법문을 잘 정리해야 후대에 전해질 것이란 인식을 하셨던 듯 하다. 16세때 부터 가장 많은 양과 극절하게 정리하신 것이 주산종사였다. 당신의 정리 글이 대종경에 20편 올라갔는데 가감 없이 그대로 올라갔다. 대종사님의 성음을 그대로 전해주시면서도 다양하게 전해주셨는데 이것은 그 격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이 어른은 교정원장을 하신 다음 총무부장을 하셨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주산종사는 주어진 일에만 충실한게 아니라 교단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서 하셨다.

송경은=어릴 때 아버님이 열반하셨지만 교단의 어른들이 잘 돌봐 주셨다. 아버님이 우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씀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귀여움을 받았다. 바로 주산종사의 교법으로 체질화된 인품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사회=원불교100년 앞두고 그 사상을 어떻게 체받아야 할까?

양현수
=추모사업회장이 문산(김정용), 범산(이공전), 혜타원(장경안) 원로교무님이신데 오는 11월3일 법문집과 추모문집을 봉정하려 한다. 후진들이 어른들을 좌표삼아 나가야 한다고 볼 때 주산종사의 인간상·신앙수행·문학사상·예술사상에 대한 사상발표를 열고, 주산종사 기념전도 원불교역사박물관에서 하려 한다.

주산종사는 원불교 인물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다. 초기교단의 종합적인 기틀을 잡아주신 분이기에 원불교 교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이 되겠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인물을 부각시키면 미래의 방향을 감잡고 갈 수 있다고 본다.

김정용=주산종사는 짧은 생을 살았기 때문에 기억하는 분이 없다. 현재 친견하신 분이 20여분 밖에 안남았다. 짧은 생을 사셨지만 긴 삶을 산 사람보다 많은 공헌과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원불교 100년을 앞두고 있어 거교적인 추모사업회는 구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모신 분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이유는 후진들이 보고 가슴에 새겨 훌륭한 스승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주산종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개교 100년을 앞두고 잘 열어가자는 것이다. 많은 법설을 찾고, 주옥같은 추모글을 정리했으니 후진들은 이 문집을 반드시 읽어 달라.

송경은=이명훈 여자금강단장이 쓴 글을 되새긴다.

“각자가 제2의 주산이 되어 교세의 대 왕성을 이루겠습니다.”

우세관기자 woo@wonnews.co.kr



“정신이어 개교 100년 열어가자”

“교정원장 역임 후 총무부장 수행”

“인재양성이 원불교 미래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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