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종사탄생100주년 기획연재 2. 주산종사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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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종사의 <노엽달마도>는 백학명 스님으로부터 사사받은 것으로 눈동자를 갈색으로 점안하여 빛을 발하는 안광이 매우 이색적이다. 대종사의 시자로 있던 15세의 주산종사가 학명스님의 시자로 있던 정산종사를 방문하여 먹을 갈 때, 스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달마도를 그렸다가 스님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나에게 배워라'라고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주산종사의 달마도 맥은 고산 이운권을 거쳐 경산종법사에게로 이어졌다.




올해는 주산 송도성 종사의 탄생 1백주년이다. 주산종사는 정산종사의 친 아우로 함께 대종사를 보필했다. 해방 직후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이끌다 득병하여 젊은 나이에 열반했으나 그의 짧은 생애는 교단 만대에 사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11월 주산종사 1백주년을 맞는 함축된 사업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앞두고 <원불교신문>은 주산종사에 대한 추모 존숭의 뜻으로 생애와 사상, 좌담을 연재한다. 이번 호는 원광대 대학원장인 양현수 교무(일본교구장)가 ‘주산종사의 사상’을 조명한다.



주산종사, 민중 속의 활불!

“힘을 떨치고 정신을 살리어

공도사업에 정진하는 일,

멀리서 마음 든든하다.

내내 잘 있거라”



주산종사(송도성, 1907-1946)는 26세 된 1932년(원기 17), <연두서(年頭誓)>라는 제목으로 새해의 서원을 밝히고 있다. 그 중의 계획조항은 네 가지이다.

‘1. 사은사요 삼학팔조의 한문교과서를 하나 저작하여 보았으면 한다. 2. 법설기재에 특별 주력하려 한다. 3. 민중생활에 많이 접근하려 한다. 4. 종사주(소태산대종사) 설법하신 범위내에서 본교 현행의 모든 규칙과 미래에 실현할 제도 예식을 종합하여 , <대도천헌(?道?憲)>이라 명명하고 책자 하나를 편집하여 보았으면 한다.’

얼른 보기에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소박한 바람의 일단을 적은 것으로 비친다. 그런데 금년의 탄생백주년을 앞두고 법문집과 추모문집을 구성하기 위해 관련자료를 망라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네 가지 계획조항이 일생의 포부요, 이전부터 이를 충실하게 실행해오고 있던 내용이라는 점이다.



네 살부터 한학 배우고 12세 도문에 들어와

주산종사께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정리한 한문본 <정전>이 있었다. 재가 제자가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알아냈으나 아직 원본을 입수하지 못하였다. 한문본 대종사법설 수필집 <법해적적(法涇滴滴)>은 발굴했는데, 번역해 보니 20편 모두가 <대종경>결집 당시에 채록되어 있었다. 법문의 거의 전부가 내용 가감없이 채록되었으니 수필(受筆)수준의 극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한문교양은 어떻게 완성했을까? 다양한 유문에는 한시를 비롯하여 한문서간, 고경역해(古解) 등이 남아 있어서 그 수준을 짐작케 한다. 친형인 정산종사의 학문은 사미헌장복추-공산 송준필을 이은 유학 근백년의 영남학맥 대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주산종사 역시 다르지 않다. 네 살부터 배우기 시작한 한학은 고향인 경북 성주를 떠나 전남 영광의 대종사 문하에 입참할 12살 되던 1918년(원기 3)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넘어 경사자집(史子集)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대종사는 제자되기를 원하는 주산종사에게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이 한문 글귀로 남아 있다.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넓고 지극히 큰 것이니 정신을 수련하여 그 지극히 큰 마음을 확충할 따름입니다.’(?心者至廣至?物. 修練精神擴充其至?之心而耳)



‘패기 가득한 성자, 공문의 맹자’로 평

드디어 16세 된 1922년(원기 7) 봉래정사에 주석중인 대종사를 찾아 출가 서원송을 올린다. 원불교인으로서 처음 기록되는 출가송이다.

‘마음은 영부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리며 영겁토록 쉬지 않겠나이다.’(?心靈父許身斯界 常隨法輪永轉不休)

대산종사는 이런 마음을 출가위 심법으로 본다.( <법어> 공심편 59)

주산종사께는 1930년(원기 15) 이전에 정리된 대종사 수필법문 <법설수필집> 2권이 전한다. 그 가운데는 16세 당시에 청문한 법문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친근한 ‘변산 아홉 구비 험한 길에 돌이 되어 물소리를 듣는다. 없고 없고 또한 없는 것도 없으며 아니고 아니며 또한 아닌 것도 아니로다.(邊山九曲路 石立聽水聲 無無亦無無 非非亦非非)’(<대종경> 성리품 11)라는 법문이 그 하나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리품의 법문은 주산종사의 수필법문이 없었으면 결집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런데 16∼7세에 청문한 법문기록을 얼마나 가치 있게 볼 수 있을까? 석존회상의 아란존자도 불멸 후 경전결집 시기에 청법만이 아니라 도 이룸을 대중들로부터 다그쳐 들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산종사의 법문수필은 ‘내가 이와 같음을 듣자오대(?是我聞)’로 시작되는 대승경전의 설법연기(6성취)처럼 법문이 베풀어진 정황은 물론 그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 주산종사의 태산같이 엄정한 모습(泰山嚴嚴)을 비추어 공자문하의 맹자에 견주어 본 범산종사의 견해(「주산종사의 인간상」)는 여러 면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논설문의 주제를 보면 주산종사가 추구했던 가치가 드러난다. ‘대업을 완수토록 용맹정진하라’, ‘이기심과 이타심’, ‘우리는 한번 변합시다’, ‘땀 한 방울의 변화’, ‘승급의 인과 강급의 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꿈을 깨라’, ‘안분과 분발’,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것을 밝힘’ 등이다. 대중과 고락을 함께 한 민중의 진취적인 지도자상, 그것을 제자들은 ‘패기 가득한 성자’(이은석)라 그리고 있다.



탄력 넘치는 싯구절 새회상 건설 진정성

시심(詩心) 넘치는 생활은 자칫 일상화되기 쉬운 삶에 탄력을 불어넣어 준다. 주산종사가 남긴 주옥같은 시는 곡이 붙여져 성가로 불린다. ‘임께서 내 마음’이 동지들과 낙도하는 생활을 읊고 있다면, ‘물욕충만 이 세상에’는 삼산 김기천,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합작한 불법연구회 당시의 회가로 새 회상 건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천년 전 옛 부처 우뚝 서셨고/ 한나절 이 신선 잘도 쉬었다/ 대종사 옛 자취 그 어디멘고/ 옛탑 앞 푯말 둘레 머뭇거리네.(屹立千年佛 優遊半日仙 聖蹟馮何覓 盤桓古塔前)’(金山寺韻)

‘사람마다 이 거문고 안 가진 이 없나니/ 네 거문고 내 거문고 한데 합해 치잤구나/ 정의(正義) 사업 행진하며 두덩실 두덩실/ 불의사마(不義邪魔) 격퇴하며 두덩실 두덩실.’(심금)

주산종사가 교화현장을 개척한 것은 20세 된 1926년(원기 11), 경성(서울)출장소 초대교무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지금 수도권 교화의 틀이 이로부터요, 당시에 만난 구타원 종사와는 영생의 도반으로 교단의 크고 작은 일을 앞서서 이끌어가게 된다. 이듬해 교단의 첫 교과서 <수양연구요론>의 출판이 그 예이다. 이후 주산종사는 행정을 펴면서나 교육훈련을 담당하면서 항상 교화현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교단의 기관지 편집을 담당하고, 영산출장소며, 교서결집에 일정한 몫을 담당하면서 현장을 독려하고 있다.



개척정신 교화·교육·자선 곳곳에 스며

주산종사가 학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3세 된 1929년(원기 14) 선원 교무로 파견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영산에 주재할 때는 그곳에서 학원을 운영하였는데 <선원일지>에는 대중과 함께 하면서 공부길을 잡아주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대중 속의 활불 그 모습이다. 선원이 운영되면서 ‘인재양성소 기성연합단’, 그리고 학원체제가 갖추어지며 ‘유일학림’(1946, 원기 31)을 준비하여 개설을 목전에 두고 열반에 들었다. 해방 후 조국 재건기의 전재동포구호사업 활동 중에 일어난 일이다.

대종사는 교단초기 로드맵, 즉 1회 12년 1대를 36년으로 하는 회기를 마련하여 제도 이념을 베풀어 나갔는데, 만년에 이르러 교화·교육·자선이라는 교단 3대 사업목표를 분야별로 설정하였다. 대종사 열반(1943, 원기 28)으로 허허한 교단을 새롭게 가다듬어 나가는데 앞장선 지도자가 주산종사였던 만큼, 자선사업에서는 물론 교단적 현안이 된 교육기관 마련 역시 기다리는 일이었다.



민중구호 실천 도중 40세 열반

최근에 이르러 서울역 앞의 구호사업을 전개하는 사진 2장이 박정기 원로교무에 의해 발굴되었다. 하나는 구호 민중의 인파이고, 다른 하나는 천막 안의 구호소 모습인데 의자에 앉은 인물이 주산종사인 것으로 보인다. 그해 3월 13일의 광경인데 15일에 총부로 귀환하여 발병하고 27일에 열반하였으니, 민중과 더불어 일속에서 40세의 아까운 일생을 마친 것이다. 고열로 신음 중에 베풀어진 최후법문은 이렇다.

‘진리는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고 시방을 두루 해도 다름이 없으니 우리는 이 진리를 체받아서 진리적 생활을 하자.’( <금강> 창간호)

이와같은 지도자를 잃은 교단의 상하가 얼마나 애통해 했겠는가. 당시의 서간문은 깨우침 위에 일생을 살아간 활불의 사자후로 우리들을 철들게 한다.

‘힘을 떨치고 정신을 살리어 공도사업(公道事業)에 정진하는 일, 멀리서 마음 든든하다. 내내 잘 있거라.’

양현수 교무 / 일본교구장, 원광대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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