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교당 윤순명 교무의 좌충우돌 인도교화담 <1>

▲ 16일 봉불을 앞둔 델리교당의 게스트하우스.
최초의 인도인 교무 원현장 교무가 있는 델리…현장 교무와 모자처럼 살며 교화를 하라며 올해 사령되었다.

전무출신 생활중 크게 보람된 곳이 있다면 근원성지 영산에 있는 영산선학대학교(당시 영산선원)에서 14년간 대종사님과 선진님들의 기운을 느끼고 체 받으면서 주타원 윤주현 종사님 그리고 여러 교무님들과 기쁘게 정성으로 교육의 현장에 임했던 때다.

다음은 서울교구 강남교당에서 15년간 서타원 박청수 종사님 그리고 교도님들과 한마음으로 하나된 때이다. 세계 여러나라에 원불교를 알리고 삼동윤리 실천을 하는데 조그만 힘이나마 함께하여 대종사님께 보은을 하니 또 마음이 한없이 기뻤던 때다.

이제 우리 회상 연원 불지인 인도의 델리 교화 개척지에 발령을 받고, 2월27일 경타원 오현진 덕무와 함께 인도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사랑하는 스승님, 동지들, 그리고 강남교당 교도님들의 기운을 듬뿍 받고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이다. 델리 공항에 도착하니 밤12시, 공항은 그렇게 밝지 않고 후덥지근했다.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을 보면서 이제 다른 나라에 와 있음을 실감나게 느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마중나온 현장 교무를 만났을 땐 그 반가움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현장 교무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황금색 꽃 목걸이를 신문지에 싸서 들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반가워서 꽃 목걸이 걸어주는 의식을 잊어 버렸다고 짐을 싣고 가는 차안에서 말했다. 그런 현장 교무의 모습이 천진스럽게 보였다.

어둑어둑한 밤거리를 달리는 차안에서 신축중인 델리교당을 보았다. 경황없이 교당 가까이에 방을 얻어 살고있는 집에 임시로 짐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산책을 나갔다. 인도의 수도 델리 하늘은 언제나 뿌옇게 먼지를 덮어 쓴 것처럼 보였다. 우리 주위에는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는 소, 다람쥐, 원숭이 여러 종류의 새들, 도마뱀, 간혹 커다란 코끼리, 그리고 대소변을 보기 위해 물통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게다가 찜통같은 더위는 내가 먼나라에 와 있음을 상기 시켜주었다. 그렇게 인도 델리 교화 개척 생활은 시작되었다.

많은 분들이 델리의 더위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더위니 처음부터 잘 대응해야 한다고 충고를 한다. 그러나 나는 ‘수양력으로 이겨 낼 수 있겠지?’라는 다짐으로 인도 생활을 맞았다. 하지만 델리의 생활은 현장 교무의 배려로 점점 적응이 되어가는데 더위를 극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어려움이었다.

섭씨 37도, 38도, 40도…

‘아! 인도 델리가 화(火)통이구나 화통이구나’라고 절로 입에서 나오다 보니 더 더위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델리는 화(和)통이구나 화(和)통이구나’라고 외우다보면 일체유심조라 할까 조금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왠걸, 온도가 45도 까지 오를 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흐르는 땀을 닦아 내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일체유심조 공부도 어찌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 때 현장 교무가 “더 이상 여기 있는 것은 어려우니 라닥으로 가는게 좋겠다”는 권유를 했다. 라닥은 히말라야 산중에 있고 이곳에 국제명상센터도 있기 때문에 이에 응하기로 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