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100년 특집 ┃ 이웃종교 100년에서 배운다 完 - 중국 삼계교

사진은 중국 서부 돈황석굴로 삼계교의 전적(典籍)인 <삼계불법>, <대근기행법(對根起行法)>, <신행유문(信行遺文)> 등은 모두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불법운동의 흥망

불법운동의 역사는 성공과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자신만의 깨달음에 몰두했던 소승에 비해 대중불교를 위해 재가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승불교 운동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승한 중국의 불교는 또 다시 시대를 따라 천태, 정토, 선불교를 대표로 하는 불교 운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성공한 불교운동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지금도 여전히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군소의 이름으로 명맥은 유지하되 교조 또는 조사의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불교로의 지향성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 못하고 집안의 불법으로 전승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상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존재한다.

물론 이는 종교 내지는 종파의 내적 요인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외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인 요소 또한 무시할 수 없음도 사실이다.

시대와 지역의 상황과 어떻게 잘 조화를 이루며 당시 민중들의 고통에 찬 마음에 어떻게 부처님의 참다운 정신을 심으며 삶을 잘 헤쳐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에 불법운동의 성패의 열쇠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 삼계교는?

5~6C 폐불시기
말법시대를 표명

시대·지역 맞는 교설
중생치유 최상승법

부패 보수교단과
왕권탄압으로 소멸


수나라(581∼619) 때 일어나 송나라(618∼1279)에 이르기까지 약 3∼400년간의 역사를 지녔던 삼계교(혹은 종)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종교운동이다.

삼계교는 신행(信行, 540∼619)에 의해 일어난 보편불교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정신의 불교가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으며 지금도 그 연구는 진행되고 있다. 다만 그 흥망의 과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살펴보고자 한다.

원불교100년을 앞둔 지금, 원광대 사상연구원에 근무하는 원익선 교무가 삼계교를 살핀다. 여기서는 삼계교의 교리적 특성을 소개하고 소태산 대종사의 불법운동과 비교하여 그 의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신행의 시대는 말법사관이 불교계를 지배했던 시대였다.

불법이 500년의 정법과 500년의 상법시대를 지나 만년의 말법시대에 접어들어 새롭게 부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싹튼 것이다. 당시 천태종의 지의(智義) 및 그의 스승인 혜사(慧?), 정토교의 도작(道綽), 삼론의 길장(吉藏) 등은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말법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신행 또한 이러한 의식을 극복하고자 삼계교 운동을 편 것이다. 삼계(三階)는 세 단계 혹은 계단을 말하는 것으로 정법이 제1계, 상법이 제2계, 말법이 제3계로 신행의 시대는 곧 말법의 시대임을 표출한 것이다. 당시는 중국에 있어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가운데, 446년 북위의 태무제에 의한 폐불과 574년 북주의 무제에 의한 폐불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무제의 폐불은 4만여의 사원을 귀족의 저택으로 만들었으며 승려 300만 명을 일반민중으로 만듦과 동시에 수많은 경전을 불태워버렸다. 원인은 국가의 재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불교의 타락과 부패가 부채질한 면도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혜사와 도작은 말법시대의 불법의 타락에 대해 내적인 자기반성의 입장에 서서 신앙과 수행을 통한 불법의 거듭남을 주장했다.

신행은 삼계의 의미를 장소와 사람에 대해서도 적용시켰는데 장소에 대해 제1계는 불토인 정토극락을 말하며 제2계와 3계는 더러움으로 물들여진 예토(穢土)로 보았다. 사람에 대해서도 최상의 근기로서 모든 계율과 정견(正見)을, 혹은 정견만을 지키는 일불승을 제1계로, 최상의 근기로 모든 계율과 정견을 지키는 3승의 성문, 연각, 보살의 위와 정견만이라도 지키는 중생은 제2계로 보고, 계율과 정견을 모두 무너뜨린 범부중생의 세계를 제3계로 보았다. 제3계의 중생은 부처도 교화 못하는 공견(空見)과 유견(有見)에 빠진 이근(利根)과 무참무괴(無慙無愧)의 둔근(鈍根)으로 나누어 보았다.

여하튼 신행은 불법에 대한 시대와 장소와 인간의 근기가 모두 저열한 것으로 보고, 이에 따라 소멸해가는 불법을 근기에 따라 실천으로 부활시킨다는 의미인 대근기행(對根起行)의 법으로써 보법(普法)과 보불(普佛)의 불교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불법운동을 시기상응(時機相應)의 불법이라고도 한다. 즉 특별한 방식의 불법에 의한 구제가 아니라 중생 모두에 의한 중생 모두를 위한 불법운동을 천명한 것이다.

당시의 중국불교는 세력의 확장아래 교상판석을 세우고 자파의 우열을 논하며 중생에 대한 구제의 방식에만 논의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신행은 이를 비판하며 부처님의 설법이 응병여약(應病與藥)의 수기설법이므로 시대와 지역에 맞는 교설을 통해 중생의 아픔만을 해결할 수 있다면 최상승의 법이라고 보았다. 말세중생에게는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는 파계무계의 근기이기 때문에 별진별정(別眞別正)의 불법에 해당되는 제1, 2계의 불법이 아니고 보진보정(普眞普正)의 제3계의 불법이야말로 보법이라는 것이다. 보불은 모든 형상불, 사마불(邪魔佛), 진불(眞佛), 보진보정불(普眞普正佛), 그리고 마지막 보진보정불에는 여래장불(?來藏佛), 불성불(佛?佛), 당래불, 불상불(佛?佛) 등이 있는데 중생의 근기가 하열한 이 시대는 모든 형태의 부처를 부처로 보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유불성(?有佛?)사상과도 통한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갊아 있으며 서로 공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법과 보불의 사상은 보경(普敬)과 인악(認?), 공관(空觀)의 실천적인 가르침으로 설해졌다. 보경은, 모든 중생은 불성인 여래장을 가지고 있어 언젠가는 부처가 되므로 설사 악마나 삿된 인간 누구일지라도 공경하고 예배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더욱이 인간은 부처 아님이 없으며 성인의 성품을 갖추고 있으므로 명상과 언어에 매이지 말고 공경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서로 싸울 일이 없는 불국토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신행과 그 신도들은 I법화경 J에서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 모든 중생이 부처님이 될 것으로 믿고 가볍게 보지 않으며 예배한 것을 본받아 길에서 만나는 모든 중생을 공경하고 예배하였다. 인악은 말법시대의 인간의 근기를 인정하고 그 악행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며, 공관은 이러한 보경과 인악도 연기와 공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무소유에 바탕한 행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계교의 수행에 있어서도 신행은 일체불, 일체법, 일체승에게 귀의할 것이며, 일체중생을 다 제도시킬 것, 일체 악을 다 끊을 것, 일체 선을 다 실천할 것, 일체 선지식을 만나 도를 구할 것을 설하였다. 이를 위하여 삼계원이라고 하는 삼계교 독자적인 사원을 대중이 모여 사는 곳에 만들고 동행동신(同行同信)의 신자가 생활하는 가운데 포교하고 두타걸식(頭陀乞食)행을 하도록 하였다. 신행 스스로도 승려로서의 입장보다도 민중과 함께하면서 노동과 생산에 투신하면서 그 이익을 대중에게 베풀었다. 또한 신도들의 희사를 통한 무진장원(無盡藏院)이라는 금융기관을 두고 빈민을 구제하는 사업을 벌였다. 이는 오늘날의 복지사업에 해당되는 것으로 사회적 이타행의 실천으로 수많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행의 불법운동은 수, 당, 송나라를 거치면서 부패한 보수교단의 질투와 시기, 그리고 일반민중의 조직적인 세력을 두려워한 왕권에 의해 탄압을 받고 결국에는 소멸되어 갔다. 이처럼 기성교단과 정권의 철저한 탄압에 의해 사도로 낙인된 삼계교의 교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경록에도 간간히 보일 뿐 자료는 거의 말소되었으나 돈황석굴에 보관된 삼계교 관련 자료가 발굴되어 현재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삼계교 운동의 의의

인간 근원에 대한
믿음 다시 일으키고

왕권지배 벗어나
불법 실천과 개혁

삼계교 조사 신행의 일생은 문자 그대로 무소유의 행 그대로였다. 어느 것 하나 사적인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해 살다가 간 시대의 조사이자 부처였다. 소태산 대종사 또한 개인적인 것은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고 일체심과 일체행을 중생의 고통과 함께한 주세불이었다. 불법의 역사는 이러한 시대불을 통해 자기변혁의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자연적인 시간관을 기반으로 한 말법사상이 바탕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불법의 퇴행을 막고자 한 진리의 자기현현(顯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옛날 부처님께서도 정법(正法)과 상법(像法)과 계법(季法)으로 구분하여 법에 대한 시대의 변천을 예언하신 바 있거니와, 그 변천되는 주요 원인은 이 경전이 번거하여 후래 중생이 각자의 힘을 잃게 되고 자력을 잃은 데 따라 그 행동이 어리석어져서 정법이 자연 쇠하게 되는지라(수행품 22장)라고 하였으며, 정산종사 또한 불법연구회 창건사에서 ‘옛날 영산회상이 열린 후, 정법과 상법을 지내고 계법(季法)시대에 들어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여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증심하였나니 이것이 곧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고 하신 불일중휘 법륜상전의 정신과 일치한다.

신행과 소태산은 인간의 근원에 대한 믿음을 다시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보경과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바로 말법의 상황아래에서도 타자가 곧 부처임을 알고 불공할 수 있다면 바로 불국토가 전개됨을 알고서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불법실천을 중심으로 했던 불법연구회의 개인과 집단불공의 역사는 바로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욱이 소태산은 일찍이 <불법연구회 근행법>의 <불교 대중화의 대요>에서 ①도량은 신자의 집중지에 치(置)하고 일상생활에 접근케 함 ②불조정전(佛祖正傳)의 심인(心印)을 체로 하고 계정혜 삼학으로써 훈련의 요도를 정함 ③교과서로 사용하는 경전은 평이한 문자와 통속어로써 편찬함 ④불제자의 계통에 있어서 재가·출가의 차별이 없이 그 지행의 고하에 따라 정함 ⑤영혼 제도만을 주로 할 것이 아니라 인생의 요도(要道)를 더 밝혀서 영육이 쌍전케 함 ⑥걸식·시주·동령(動鈴)·음식불공 등을 폐지하고 근로정신을 함양하여 교화에 노력함 ⑦결혼은 법으로써 구속하지 아니하고 자유로함 ⑧여자 포교사를 양성하여 여자는 여자가 가르치게 함 ⑨재래의 의식과 예법을 사실과 간편을 주로 하여 현대생활에 맞게 함이라는 강령으로 불법의 대중화와 사회화의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실천불교, 참여불교의 정신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신행의 보법(普法)과 보불(普佛)과 보행(普行)의 사상이 소태산 대종사의 시대에 적용이 된다면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되살아날 것이라고 본다.

그 외에도 신행은 왕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 불법의 실천정신에 바탕하여 이를 확장, 개혁하였다는 점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불법운동과 일맥상통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당시의 사찰령과 30본말사제로부터 자유로운 불법운동을 일으켜 도산 안창호로부터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실시품 45장)라는 찬사를 받는다. 신행의 삼계교는 결국 기성종단과 왕권의 탄압 아래 소멸되었지만 소태산의 개혁은 현재진행으로 당시의 불교개혁에 대한 열망을 실천적으로 완성시킨 입장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행의 삼계교는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의 중세와 근대의 불교개혁운동, 또한 일본의 중세와 근대에 일어났던 선택과 집중의 불법운동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본다. 교리적으로도 동아시아 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최근의 연구에서도 보여주고 있는데 불법의 자기혁신이라는 면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