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에 항마하고 새벽에는 여래에 오르면

또 삼산이 등장한다. 법위나 성리 등 핵심적 질문에서 삼산이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보통급에서 항마위에 오르는 공력과 항마위에서 여래위에 오르는 공력이 어느 편이 어렵습니까?”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그것은 근기(根耭)에 따라 다르니, 혹 최상 근기는 항마하면서 바로 여래위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항마위에 올라가서 오랜 시일을 지체하는 근기도 있다”

깨침과 닦음의 문제는 오랫동안 ‘돈점논쟁’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한국불교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돈오돈수(頓?頓修)를 주장하는 성철스님의 입장은 몰록 깨치는 순간 수행도 모두 마치게 된다고 말하고, 돈오점수(頓?漸修)의 보조스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품을 알고 나서 다시 닦는 행을 더 해야 성불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서로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은 채 생각의 골이 깊어왔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윤회와 삼세를 전제한다면 돈점논쟁의 방향은 자명하다. 돈점논쟁의 궁극은 전생의 도업(道業)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냥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돈오점수는 모든 성인이 가야할 정해진 길임에 분명하다. 다만 전생의 닦음이 충분하여 깨달음을 얻은 즉시 닦음을 마치는 근기도 있고, 전생의 닦음이 부족한 관계로 깨달음 후에 수행길이 다시 먼 길로 펼쳐진 근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항마에서 바로 여래위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항마위에 올라가서 오랜 시일을 지체하는 근기도 있다는 대종사의 근기론은 돈점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말씀이다.

필자의 앞선 글에서는 특신이나 상전에서 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이번에는 항마가 문제가 된 대목에 대하여 헷갈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특신급 이후 여래지에 몰록 이르는 사람도 있다는 대산종사의 주장을 상기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다.

특신급 이후 여래에 이르는 길을 시간의 단위로 계산하려 한다면 컵으로 바닷물을 재려는 시도와 다를 것이 없다. 하루에 대장부 일대사를 마쳐서 초저녁에 항마하고 새벽에 여래에 오르는 인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존재는 헤아릴 수 없는 차원과 수많은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에 이르는 길 또한 매우 다양하다. 문제는 길이나 원리가 없어서가 아니고 철저한 서원과 용장한 분발심이 없음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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