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은 건국 60주년을 맞는 해이다. 냉전체제에 편승한 분단국가의 수립은 한국현대사에서 불행의 출발이었지만 60년을 맞게 된다. 건국 60년을 앞두고 우리 교단 선진 어른들 가운데 남북이 통일된 국가에서도 건국의 공로를 인정받아야 할 몇 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늦은 출가였지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변중선 선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비록 건국 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조송광 선진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자이자 3·1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였으며 유허일 선진은 3·1운동 관련 이력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송벽조 선진은 일본 천황의 퇴진을 주장하여 1년6월의 옥고를 치른바 있다.

그리고 2년7개월의 수형생활을 한 박대완(본명 朴正立) 선진의 활동이 가장 분명하다. 이 분의 독립운동 이력에 관해서는 그동안 교단에서 막연하게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국가기록원과 보훈처에서 공개된 판결문을 보면 그 활동내용을 소상하게 알 수 있다.

박대완 선진은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의 모금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19(원기4)년 10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미결 구금일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2년 7개월간을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만기 출소한 사실이 있다.

당시 사건은 상해임시정부 자금조달을 위한 중국화폐 위조사건이다. 당시 박대완 선진은 조덕삼이라는 사람의 부탁을 받고 서울의 안우선 정태영과 함께 지폐위조를 공모하여 중국 길림성에서 통용되는 중국지폐 50조권 5만여장을 인쇄하던 중 검거된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박대완 선진은 김제의 조내헌과 전주사람 하일청 등에게서 인쇄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한 사실이 들어난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5명이 모두 실형을 받았는데 이 중 인쇄시설을 설치한 집 주인인 안우선은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다.

박대완 선진은 1885년 전남 여천에서 태어나 목포의 사립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일본 쿄오토오의 도립 제2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동경 기상대에서 3년6개월간 수습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인천관측소와 목포 측후소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엘리트였다.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자 측후소에서 사직하였고, 함평의 일본인 농장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곡물상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38살 되던 1922년에 대구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부모님이 계시는 영암으로 가서 농사일을 돌보면서 만주 일대와 전국의 사찰을 순회하다가 43세 되던 1927(원기12)년, 지인의 소개로 대종사를 만나 입문하게 된 것이다.

내년 건국 60주년을 맞아 박대완 선진의 독립운동 이력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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