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正)으로 발원해 정력(正力) 얻어야"

▲ 만덕산 초선지, 원불당이라고 쓰여진 전각의 도랑 건너편. 원래 집이 있었지만 터만 남아 있다.

마이산은 <고려사>에 처음 등장한다. 말의귀와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책은 "진안현에 마이산이 있다"면서 이와함께 "신라에서는 서다산(西多山)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서다산은 산이 '서다[立]'를 음차(音借)한 것이다. 또 다른 책에는 "봉우리가 솟았다"는 뜻인 용출봉(湧出峰)이 쓰였는가 하면 '속금산(束金山)'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속금산(束金山)'은 산 아래 토박이들이 즐겨 썼다고 하는데, 이는 솟은 산의 사투리 '솟금산'을 음차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이산은 둥글둥글하고 펑퍼짐한 주변산세와는 달리 특별하게도 말귀처럼 우뚝 서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말의 귀는 산 주변의 어느 산마루에서 보더라도 금방 눈에 띈다.

▲ 좌포교당  장경도 교무가 쌓은 탑.마치 교당 안이 마이산을 옮겨 놓은  듯하다. 그는 교당 마당에 갖가지 이름의 탑을 쌓았다. 좌포교당은 대산종사 생가와 김승지댁 사이에 있다.


산보다 잘 난 탑

<성호사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려 태조 유촉하기를 차령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세가 나란히 배역의 형세를 취하고 있다. 공주강이란 금강을 말한다. 호남의 덕유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돌아 역류하여 공주의 북방으로 나와 금강으로 들어간다. 신도 계룡산 또한 덕유산의 일맥으로 임실의 '마이산'을 거쳐 회룡고조의 형국과 같이 공(公)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런즉 금강을 풍수가들은 소위 반궁수(反弓水)형이라 부르는데, 송도 뿐 아니라 한양까지를 겨누는 형국이며, 계룡산의 신도에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금강이 반궁수형이니 공(公)자모양이니 하는 말은 금강의 물줄이 활처럼 휘어졌다는 것이고, 계룡산에서 마이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는 산줄이 활줄에 실린 화살과 같다는 이야기다.
아닌게 아니라 지도를 펴보면 마이산으로부터 운장산과 대둔산을 거쳐 계룡산까지 이어지는 산줄은 일직선이다. 계룡산이 화살촉에 해당하고 마이산은 화살의 꼬리에 해당한다는 것인데, 이 화살의 방향은 서울과 개성을 겨누고 있다고 해석한다.
묵묵하고 가만히 있는 산을 보고 사람의 알음알이로 배역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왕조시대가 지난 지금의 풍수라면 해석을 달리 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서울일급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산세' 정도로.
화살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기운들을 흩어 금강 이남으로 모으고 이를 계룡산으로부터 마이산을 거쳐 덕유산까지 뿌려 놓는다면 서울 쏠림이 지나치게 심한 국토의 균형을 다소 다스려 주지 않겠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울사람들만 바라보고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뉴스를 틀면 서울소식이고 드라마는 서울이야기이고 신문은 서울의 신문이다.
우리는 서울 밖에 살면서 우리 동네와 우리 이웃의 이야기 보다 서울이야기에 관심이 더 많다.

▲ 풍혈 냉천. 좌포리에 있다. 풍혈이라 쓰여진 입간판이 붙여진 담 안을  들어가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늘 영상5도C를 유지하고 있다. "무지무지 더운날이면 간절히 그리운 곳이다."


이전에도 있던 탑

풍수의 대가 도선은 이와같은 쏠림현상을 가장 우려했다. 만약 도선의 입장이라면 서울쏠림 형국은 큰 재앙을 불러들일 수 있는 풍수이다. 도선은 우리국토의 생김새를 배와 같다고 보고 배가 균형을 잃으면 기울어지듯 국토가 한곳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곳곳에 탑이나 절을 세워 비보를 썼다.
마이산은 탑 이야기로 유명하다. 탑은 이갑룡처사가 이루어낸 평생업적이다. 탑과 마이산은 동시에 연상작용을 일으킬 정도로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있다. 진안문화원 최규영 원장은 이 탑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다. 이 탑이 비보로써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는 '배역(背逆)형세의 땅'을 일어서지 못하게 돌탑으로 눌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탑의 초기 조탑자는 이갑룡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산에는 이갑룡 이전에 막돌탑 형태의 탑이 이미 존재했다고 이야기한다.
마이산을 찾은 원불교 선진들은 많다. 송도성은 스물한살의 나이인 1928년 박대완 전삼삼 등과 함께 마이산을 기행하고 '마이산행감'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탑을 쌓고 있는 이갑룡처사를 "정(正)으로 발원하여 정력(正力)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邪)로 발원하여 사에 힘을 얻은 것"이라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군일도 마이산의 즐비한 탑을 보고는 '산에 사는 사람이 헛대히 공력을 낭비했다'고 꼬집고 '바위에 앉아 명월을 벗삼고 정(定)에 드니 / 마이산 두 개의 봉우리가 푸른 공중에 우뚝 솟았네. / 하늘 밖의 선인의 말씀이 있어 / 문득 오늘 저녁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겠네'라는 선시를 남겼다.
육타원 이동진화가 대종사를 찾아 떠나는 길에 마이산을 방문한 시기는 송도성 일행 보다 4년정도 앞서 있었다. 그도 이갑룡을 만나보고는 실망이 매우 컸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육타원이 길을 떠난 이유는 서울서 대종사를 친견했을 때 대종사로부터 들은 성불제중(成佛濟衆)의 법문 때문이다.
대종사는 당시 육타원에게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이 둘이 있는 것이요. 하나는 바른 스승을 만나서 부처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대도를 성취한 다음에 창생을 건지는 일인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어느날 문득 그는 대종사의 말이 떠올라 홀연히 길을 떠난 것이다. 육타원의 출가이야기는 박용덕의 책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대산종사 생가에는 대산종사의 제수씨인 보타원 양보훈 교도(사진)가 살고 있다. 보타원이 앉아 있는 바위는 거북바위. 바위는 마이산 바위와 같은  역암이다. 대종사는 이 바위를 보고 "여기가 마이산과 같은 산줄이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할 일이 두 개

육타원의 여정은 좌포리 김승지의 집에 이르러서야 끝이 난다. 김승지는 대산종사와 같은 일가이다. 이 집에서 그는 "생불님은 만덕산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만덕산에 찾아가 대종사를 다시 만난다.
대종사가 마이산을 찾은 시기는 육타원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다. 대종사는 마이산에 대해 아무런 말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좌포리 대산종사의 집에 머물면서 뒷뜰에 있는 거북바위를 보더니 "이 곳도 마이산과 같은 산줄기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이산의 바위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바위는 자갈과 점토질을 버물어 놓은 것같은 역암인데 대산종사의 뒷뜰에 있는 거북바위가 특이하게도 마이산바위와 같은 것이었다.

 ♣ 육타원이 갔던 길. 마이산에서 만덕산까지.

▲ 육타원은 처음 마이산에 들렀다가 실망을 하고 좌포리 김승지 댁에 간다. 그 곳에서 "생불님은 만덕산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덕산으로 달려가서 대종사를 만난다. (빨간화살표시가 행로이다.)

 

 

 

 

 

 

 

 

 

 

▲마이산 탑영지. 호면에 거꾸로 보이는 산이 아름답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