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소리로 들려 주시는 교무님의 바른 설법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사업이란 이름으로, 또는 복과 혜를 핑계로 헌금과 봉공을 독려하는 설법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그라미를 보기만 해도 엎어지고, 대종사님이란 말만 들어도 자빠지는 신앙법을 보면,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사뿐한 걸음에 흰 저고리 검정 치마의 흔들림이 고요하게 보일 때 그것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마지막 몸을 눕힌 병상에서 조석으로 올리는 심고는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고, 새내기 교도의 첫 감각 감상을 들으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잘못 주어진 법호를 당연히 받을 것을 받은 양 겸손치 못함을 보면 우리는 슬퍼지고, 한 줄 경전의 말씀이 맘에 와서 박힐 때, 우리는 한없이 기쁘지만, 알려주신 대로 행하지 못하는 나를 볼 때 슬퍼진다.

복지시설을 만들겠다는 바람으로 수 년째 비탈진 황토산을 맨몸으로 일구고 계신 체구 작은 교무님의 땀방울을 뵈면 죄송함에 슬퍼지고, 그런 교무님이 계시다는 것이 한없이 기뻐진다.
그러나 인과를 설교 할 때, 뱀이나 도깨비 얘기로 겁을 주면 슬퍼지고, 지은 만큼 받는다고 거기까지만 해주면 기뻐진다.

가난한 자식에게서 받은 적은 용돈을 유지비로 내는 주름진 손은 우리를 숙연케 하고, 지독한 역경을, 믿음의 힘으로 벗어 난 후에, 흘리는 참회의 눈물은 우리를 기쁘게한다. 낭랑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염불 소리와 고요함을 쪼개는 죽비 소리는 우리를 맑은 기쁨으로 이끌고, 남루한 아낙네가 올리는 애절한 기도의 사연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팔순 노구를 이끌고 천리를 오셔서 내려 주시는 어느 종사님의 설법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그 속에서도 졸고 있는 법호인을 보면 슬퍼진다.

창업 교도입네 하고 젊은 교무님을 애기 취급하는 늙은 교도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비켜 넘기시는 앳된 교무님의 미소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아들의 취업을 감사하면서 한 대접 맑은 물로 정성을 다하는 깡마른 어머니의 몸짓은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한다. 법회를 마치고 텅빈 자리를 말없이 혼자 쓸고 닦는 다리 불편한 교도를 보면 나는 기뻐진다.
평생을 이 일에 바치시고, 지금은 좁고 불편한 원로원 작은 방에서 우리를 맞아 주시는 옛 교무님을 뵈면, 눈물이 날만큼 슬퍼지고, 그분이 두드려 주시는 어깨의 감각은 우리를 더 없이 기쁘게 한다.

법회 때 잠시를 빼면 언제나 비어서 썰렁한 수 억짜리 교당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염불 소리 기도 소리 죽비 소리로 채워진 낡은 교당은, 우리를 환희에 떨게 한다. 스쳐가는 세월 속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면 다들 기뻐하지만, 앙상한 가지를 보고 기뻐하는 이는 흔치 않다.

그러나 앙상함 마저 앙상해진 자리에 참 기쁨과 참 슬픔이 있고 그 둘은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닦아서 알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른 도의 맛과 시원한 덕의 순풍을 스스로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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