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령의 행로
대종사가 조송광을 만난 곳
미륵을 꿈꾸었던 혁명가들

대종사의 일화부터 이야기 하자. 박용덕 교무의 책에 따르면 대종사는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 십여일 전에 한벽당에서 송적벽의 소개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조공진 장로를 만난다. 공진은 나중에 송광이라는 법명을 갖게 된다. 대종사가 송광에게 왼손을 들어 오른손 손가락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범부와 중생의 차이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요. 거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엇을 찾아보려고 이 손끝까지 올라왔다가 그 끝에 와서는 한층 용기를 내어 날 줄 모르고 원치 않는 오던 길로 돌아가 재미없는 생활에 빠져 초인적 생활을 하지 못하지요." 이 비유담이 송광의 심금을 울렸다.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선생님의 도량은 창해와 같이 넓습니다." 조송광이 일어나 세 번 절하고 제자되기를 간청하자, 소태산이 허락하며 말했다. "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1924년 6월1일 익산 보광사에서 창립총회가 열렸으므로 그로부터 십여일 전이라면 늦봄이 무르익고 새 여름을 맞을 철이다. 산이 짙푸르고 물이 짙푸른 철이라, '찰' 한(寒)자와 '푸를' 벽(碧)자의 한벽당이라는 누각이름이 강을 보고 지은 것인지 물을 보고 지은 것인지 분간하지 못할 때이다. 그러고 보니 한벽당의 녹음은 지금이 한창이다.

한벽당이 있는 산을 발산(鉢山)이라 불렀다. 발산이라면 바릿대를 의미한다. 한벽당 맞은 편 강가에서 누각 지붕을 바라보면 "아하! 그 바릿대"하고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산의 생긴 모양이 바릿대를 엎어 놓은 형국이다. 바릿대란 스님의 밥그릇이고 부처님의 밥그릇이다. 불교에서 바릿대는 가사와 함께 법맥을 잇는 징표로 사용되어 왔다.

일생을 걸식으로 살았던 석가모니부처님의 재산은 가사와 바릿대뿐이었다. 아직도 미얀마와 같은 남방불교의 수행자들은 돈을 보시 받거나 만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만, 석가모니는 걸치고 먹는 도구밖에 없을 정도로 철저한 무소유자였다. 불교이야기에 따르면 "내 바릿대를 보관했다가 미륵불이 출현하면 건네줘라"는 스승의 유촉을 받은 가섭이 바릿대를 품에 안고 미륵하생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많은 발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곧 가섭의 산이요, 미륵신앙과 연관이 매우 깊은 산이다. 한벽당이 걸려 있는 발산의 주산은 승암산(僧岩山)이다. 중바위산이라고도 한다. 중바위산과 발산이 둘러싼 골짜기가 교동인데 옛날에는 자만동(滋滿洞)이라고 불렀다. 한벽당 주변의 전체적인 구도를 그린다면 중바위산이 바릿대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미륵이 자씨(慈氏)이니 '자만동'이란 미륵이 중생의 수만큼이나 넘쳐났다는 의미인가?

"적신(賊臣) 정여립은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해 경전(經傳)을 통달했으며, 의논이 과격하며 드높아 마치 바람처럼 말했다. 이이(李珥)가 그 재간을 기특히 여겨 소개함으로써 많은 벼슬에 올려 이름이 높았다. 이이가 죽은 뒤 여립은 도리어 그를 헐뜯으므로 임금은 미워했다. 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전주에 돌아갔다. 그는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향곡에서 세력을 부려 역적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정여립(1546∼1589)사건의 내용이다. 정여립은 여러 무사들과 공사천(公私賤) 노비 등 계급의 상하를 통해 계를 조직해 이름을 대동계라 하고 매월 보름이면 모두 정여립의 집에 모여 활쏘기를 했다.

민인백의 <토역일기>는 "정여립이 벼슬을 버리고 금산사 아래 구릿골 제비산(帝妃山)으로 이주해 글 읽기에 힘쓰니 이름이 전라도 일대에 높이 나서 죽도선생이라고 일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금산사는 알려진 대로 미륵을 꿈꾸는 호남 땅의 혁명가들이 찾는 곳이다. 후백제의 왕 견훤이 밟았고 근대의 증산이 밟았던 것처럼.

정여립도 금산사의 미륵을 보며 '공사천 노비 등 계급 상하'가 절대 평등한 용화세계를 꿈꾸었던 것 같다. 미륵의 화신이 되고자 했다.

정여립을 기술한 또 다른 책에는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 [木子亡奠邑興]"는 예언설이 유행했는데, 정여립은 승려 의연과 모의해 이 예언을 옥판에 새긴 다음 지리산 석굴 안에 감추어 두게 한 다음, 대동계원들에게 은근히 보여주고는 그 말을 누설하지 말도록 당부함으로써, 그들에게 정도령(鄭道令)인 자신이 새 왕조를 세운다는 비기(秘記)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또 의연은 전국을 돌며 "내가 중국 요동에 있을 때 동쪽 나라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바라보고 한양에 이르니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에 오니 그 기운이 전주 남문 밖에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정여립이 죽자 정여립과 연루된 많은 사람이 함께 죽었다.

선조는 정여립 사건을 처리하면서 "전주는 조정의 어향이니 전주에 있는 정여립의 조부 이상의 분묘를 낱낱이 파내어 이장하도록 하고, 그의 멀고 가까운 친척들도 모두 전주에서 내쫓아 딴 고을에 살도록 하라"고 명했다. 또 그의 집터를 파헤쳤다.

전주이씨인 태조이성계의 4대조 목조대왕이 태어나 살았던 곳이 오목대인데 이를 두고 '조정의 어향'이라고 한 것이다.

정여립의 집터는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 있었다. 한벽당에서 전주천을 거슬러 올라가서 5km지점이다. 강가는 아니지만 전주 남원간 17번 국도와 가까운 곳이다. 지금은 논이다. 동네사람들은 이 논을 '파수' 혹은 '파쏘'라고 부르고 있다. 집터를 파버렸다는 것에 연유된 지명이다.

최규영 진안문화원장은 <진안문화>에 실린 논문에서 정여립이 운영했던 죽도서당은 "서당 또는 은둔수양처로는 맞지 아니하며 이 지역의 지형과 수로등으로 보아 예전에는 창고와 같은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죽도서당은 서당이 아니라 천반산으로 연결되는 병참창고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정여립이 출입했던 곳은 죽도가 아니라 천반산이며, 천반산에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산성이 있고, 성 안에는 약 4만 평방미터의 경작지가 있고 우물이 있다.

천반산은 죽도와 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서로 맞붙어 있는 산이다. 산정에는 조선후기까지 천반리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정도령에 관한 대종사의 법문이 <대종경> 에 있다. 한 사람이 대종사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전래의 비결에 '앞으로 정(鄭)도령이 계룡산에 등극하여 천하를 평정하리라'고 하였아오니 사실로 그러하오리까?" 대종사는 "계룡산이라 함은 곧 밝아 오는 양(陽) 세상을 이름이요, 정도령이라 함은 곧 바른 지도자들이 세상을 주장하게 됨을 이름이니 돌아오는 밝은 세상에는 바른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주장하게 될 것을 예시(豫示)한 말이니라"고 답했다. (변의품 33장).

충남도지사 감사패를 대표로 받은 김미진 중앙봉공회장.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