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와 허무의 끝은 치명적이다. 쫓겨 도달한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는 많다. 외설시비로 오랫동안 지하로만 떠돌아다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그 중 하나다.

삭막하다.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다. 중년의 사내가 텅 빈 아파트에서 젊은 여자와 벌이는 변태적인 섹스가 소통이 단절된 현대인의 소외와 허무를 연출하고 있다. 마침내 그 남자는 기꺼이 그 여자의 총에 죽는다. 그는 죽음만이 자신을 소외와 허무로부터 해방시켜준다고 믿었을까?

한 남자가 자살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날이 만우절이었으니까.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가 거짓말처럼 정말 자살해버린 것이다. 홍콩의 호화스러운 호텔 24층에서 장국영이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세상의 인기를 넘치도록 누려왔던 스타의 죽음이라서 허망함은 더 컸고 그래서 헤아려보는 의문이다. 왜 자살했을까? 그가 남긴 메모로 추측하자면 동성애자였다. 그는 '패왕별희'의 우희처럼 살다가 우희처럼 자살해버린 것이다. 영화는 죽음의 단서를 보여준다. 창녀인 엄마는 아이를 경극단에 버리고 도망간다. 계집애처럼 예쁜 아이는 매질로서 여자이기를 강요당하고 끝내는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 항우의 애첩인 우희역을 맡게 된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현실과 극을 구분하지 못했고, 현실에서도 우희처럼 살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절대 여자가 될 수 없었다. 그가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극장의 무대에서 '패왕별희'의 우희처럼 자살해버린다.

영화 '이도공간'에서 자살을 시도한 정신과 의사를 연기한 그가 결국 호텔 24층에서 자기 손으로 자기 등을 떠밀어 버렸다. 장국영에게 추락은 절망으로부터 탈출하는 비상이었을까?

미소가 아름다운 배우 최진실이 자살했다. 고인은 평소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녀에 앞서 가수 유니, 배우 이은주, 정다빈도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우울증은 죽음으로 가는 병이 아니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마음의 감기' 정도의 질환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에는 인터넷 악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익명 뒤에 숨어서 남을 공격하는 추악한 자들. 인터넷에 영혼까지 팔아버린 그자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야만의 기계다.

지금 나는 허망한 가슴을 추스르면서 문명을 또 다시 이야기한다. 우리가 즐기는 문명은 브레이크 없는 광기다. 지금이라도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파멸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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