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일기 ⑤ 천산 이건춘 대봉도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아무 목적없이 살아가면 악(惡)이라는 것은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되는 것이요, 자연 선(善)이라는 것은 마음에 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세상 사람들의 악한 행실을 많이 하고, 선한 행실을 적게 하는 까닭은 무슨 일이냐 하면 세상에서 양심을 잃어버리고 내 육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여 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초학시기에 있는 우리는 아무리 적은 선(善)일지라도 행하고 행하면 큰 선이 될 것이요, 아무리 적은 악일지라도 징계하지 않고 자기하는대로 두고 보면 큰 악이 되겠습니다.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된다는 옛말과 같이 처음에는 적은 악을 행하고 적은 선을 행한 사람을 비교하여 보면 그 때는 표나게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쌓이고 쌓이면 선과 악이 구분될 것입니다.

크게 선하고 좋은 사람은 세상에서 높이보고 귀하게 여길 것이며 악한 사람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미워하고 배척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악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소소한 선한 일일지라도 행하고 행하여서 큰 선이 되어 가지고 귀한 사람이 되기로 합시다.

▲ 홍현두 교무

이건춘(李建春)

천산 이건춘 대봉도(1920-1989)는 전남 영광군 군서면 학정리 대천동에서 태어났다. 농촌마을의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한 천산은 영광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이건양의 연원으로 입교, 14세시 영산선원에 입선했다.

2년간의 수학 후 서무부 서기로 근무하던 중 시대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당시 서울 배재고에 재학 중인 숭산 종사에게 교과서와 잡지 등을 요청하여 탐색한 후 심중의 변화가 있어 서울로 상경했다. 돈암교당에서 응산종사와 함께 생활하며 한영학원과 영장중학교에서 4년간 수학한 후 총부생활을 시작했다.

일제 패망 후 교단에서는 피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이리·서울·부산을 중심으로 전재동포구호소를 설치했는데 천산은 이 일에 적극 협력하다가 묵산 박창기 대봉도의 선도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 동국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인민군 치하에서 총부에 갈 수 없었던 천산은 부산에 남아 임시직을 갖게 됐다.

1950년 9월10일 아침 국가요원 중 미소지자 총동원령 문제로 보병 23연대 요원에 연행되어 군사훈련을 마치고 북으로 진군했다. 천산은 전쟁 중 장모와 처, 그리고 딸을 잃은 아픔을 겪었다.

생계에 고심하던 중 원광중·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됐다. 원광여중·고 서무과장으로 부임했다.

강한 의지와 소명의식으로 온통 공도에 바치고 전력투구한 30년. 기본금 없이 시작한 3개 학교가 오늘날 명문사학으로 굳건히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광여중 원광여고 창업의 실무에 동참한 동지들이 많지만 열성을 다해 이루어낸 천산대봉도의 역할은 원불교 교육사업에 있어 역사의 한 장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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