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신문기사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부세이고 다른 하나는 얼굴 없는 기부천사의 선행이다. 선행자의 이름이 밝혀지긴 하였지만 본인이 원해서 밝혀진 것이 아니기에 기부자의 마음을 따라서 이렇게 부른다.

주식시장 폭락 등 경제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종합부동산세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일부 위헌 결정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언론들도 연일 종부세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며, 정치권 또한 이에 대한 논란이 이만저만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찬성하는 측에선 종부세가 정치논리의 소산에서 비롯된 '약탈적 세금'내지는 '세금폭탄'이라고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는 지난 정부의 부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 때문에 탄생한 과세정책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내 주머니 속의 재물이 빠져나감에 따른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다.

종부세를 입안한 사람들의 복안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고 싶지 않다. 또한 종부세가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경제논리는 배제된 채 정치논리만으로 결정된 것인지의 여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저들이 아닌 이상 저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려니와 알고 싶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조세에 대한 평가는 오직 공평성과 효율성 여부에 있으며, 소득의 재분배라는 이익실현에 가치를 두고 있음을 상기할 때 이런 말들은 종부세의 옳고 그름을 평가함에 있어 유의미한 함수관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런 논쟁보다는 우리 사회 부자들에게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를 말하고 싶다. 작금의 우리나라 경제적 현실에서 영국 왕실의 왕자가 포클랜드 전쟁에 조종사로 참전한 일이나 철강왕 카네기, 석유재벌 록펠러 등의 수준은 아닐지라도 자신들이 누리는 '명예(Noblesse)' 만큼 '의무(Oblige)'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행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얼굴 없는 기부천사는 연예인으로서 자신이 누리는 '명예'만큼 '의무'를 훌륭하게 이행한 사람이다.

기부 천사의 선행은 그 자체로도 우리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혹독한 경제적 한파 속에 자신들이 낸 세금을 되돌려 받고자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그 가치가 더욱더 돋보인다.

정부도 얼굴 없는 기부천사의 선행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2%의 가진 사람들에게 세금을 낮춰줘서 경기를 부양하기보다는 그들이 서민들에게 먼저 손 내밀도록 독려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부의 사회적 환원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가난한 서민들은 자신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부가 있음에 다시 한 번 희망과 용기를 갖고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얼굴 없는 기부천사의 아름다움이 계층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종부세 논란을 종식시키고 서민들의 경제 한파를 녹이는 봄바람이 되길 염원한다.

/영산선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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