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 동진주교당 진선명행 교도
44년간 교화의 활화산 역할
사천·고성·동진주교당 창립

 

저녁 6시쯤에 동진주 교당에 도착했다. 오후 5시부터 시작한 독경이 끝나는 때를 맞추어 갔다. 마침 저녁때라 속이 출출했는데 진선명행(호적명 정남·78)교도가 추어탕을 끓여왔다. 경상도식 추어탕은 서울 것과 맛이 사뭇 달랐다. 진 교도의 집은 교당과는 불과 5분 거리에 있어서 그는 사랑채 드나들듯이 교당과 집을 오고간다. 교당이 가까운 탓에 오늘처럼 음식을 가져와 교도들과 나누어 함께 먹는 일이 다반사인 것처럼 보였다.

동진주교당의 이성연 교무는 그를 가리켜 "동진주교당의 창립주 어른이면서 사천·고성교당의 창립주이기도 하다"면서 "원불교의 자비보살"이라고 소개했다. 진 교도는 입교 전에는 건강이 몹시 안 좋아서 절에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 한 12년을 절에 꾸준히 다녔는데, 어느 날 스님이 하는 일에 의심이 걸려서 한 2년을 쉬었다.

원불교와의 인연은 몸이 아파 부산의 병원에 가면서 본 원불교 대신교당이 처음이었다. '불교면 불교이지 원불교가 뭐꼬?' 그는 호기심에서 교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에 들어섰는데 부처님도 안계시고 큰 촛대만 시선을 끌었어요." 그리고나서 원불교에 대해서는 간혹 "원불교는 요새 혁신불교인데 청년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날 몸이 몹시 아파 누워있는데 그에게 원불교와의 두 번째 만남이 찾아왔다. 당시 진주교당의 류익순 주무가 찾아와서 "몸이 아프냐"고 물은 후 "원불교 교당에 나와서 기도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그날 교당에 처음 나가서 이지일 교무로부터 들었던 첫 법문을 통해 "바로 이것이다"하고 생각했다. 당시 이지일 교무는 "즐거움도 마음 가운데에 있고, 괴로움도 마음 가운데에 있다. 극락도 지옥도 마음 가운데 있다"고 법문했다.

이 법문이 진 교도의 마음에 절실하게 다가오면서 원불교야말로 '내 인생의 반려자'라고 확신하고 입교를 했다. 그의 신앙이 무르익어갈 무렵에 그가 교화시킨 시누이가 갑자기 운명을 하게 됐다. 어쩔 줄을 몰라 방황하고 있는데, 이 교무의 후임으로 온 김의선 교무가 죽어가는 이의 얼굴을 부벼대는 모습에 매우 감복했다. 자신조차 무서워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데 김 교무의 모습을 보고 '신앙을 가지면 저렇게 할 수 있는가 보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후 그는 김 교무와 동행하며 원불교 교화의 활화산이 됐다. 원기 49년에 입교를 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법회에 빠진 일이 없다. 교당의 모든 일을 교무와 함께 했다. 가정일과 교당일로 늘 바빴다.

진 교도의 권선과 헌공에 힘입어 전세집에서 근근히 법회를 보던 진주교당이 원기53년에 봉불낙성식을 하게 됐다.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그의 원력은 사천·고성·동진주교당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그의 건강은 오히려 차츰차츰 좋아졌다. 교당생활 중 진 교도에게 두 번의 큰 시련이 있었다. 첫번째 시련은 부산 이모집에서 기거하며 대학입시공부를 하던 큰 아들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이었고, 두 번째 시련은 막내아들의 죽음이었다.

막내아들은 진주교당에서 동진주교당으로 옮긴지 6개월 쯤 되던 때에 학생들과 야외법회를 갔다가 강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급보를 전해들은 진 교도가 허겁지겁 현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광목을 떠 오게 한 다음 시신을 싸고 반듯하게 눕힌 채 강변에서 천도재를 주도했다.

그는 당시 아들의 죽음도 죽음이거니와 교당일이 걱정이 됐다. 교당 학생들과 같이 갔다가 벌어진 일이므로 혹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교당에 누가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현장에 찾아온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검사님 죄송합니다. 자식 키워서 이런 일 보여서 죄송합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자기자신의 실수입니다. 아들을 위한 길은 편히 쉬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진 교도는 그 때의 일을 회상하며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때 어찌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하고 반문했다.

진 교도는 4년전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 고 박승규 교도는 진주교대 교수였는데 그도 역시 동진주교당 초대 교도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떴다. 아들 박종환(55)교도는 서울지검 검사이다. 동생의 죽음으로 부모들이 백일기도를 하는동안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새벽 다섯시만 되면 "어머님 아버지 기도하고 계십니까"하고 확인전화를 하며 신앙심으로 부모들을 위로했던 아들이다.

진 교도는 그의 거실에도 법당을 마련해 놓고 선과 기도를 병행하고 있다. 그는 교당에서도 법당에 있고 집에서도 법당에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이성연 교무는 "진 교도님이 여러가지 경계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원불교 만난 재미로 산다"면서 "동진주교당에서 후진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어머니 역할을 잘 하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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