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 박장식 원로교무를 모시고.

 제우성지 주변의 부지 7,976평방미터가 확보된 것은 화해교당으로서는 기적같은 일이었다. 이 기적을 만들어주신 원로 선진님들을 비롯해 1천여명의 기도 원력이라고 믿는다.

그 분들을 일일이 전부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리교당 소타원 김순애님의 100명 가까운 권선, 신문광고 하나로 뜻을 알아차린 마포교당 이대덕님, 재래시장 가게에서 열 달 동안 보내주신 대명교당 김명진님, 김효경 정토, 고 김재선화, 김상은, 손흥도 교무 등 잊지 못할 정성들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교화 현장에 나서면서 다짐을 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참회요, 둘은 정진이요, 셋은 인연 불공이었다.

이곳 화해는 겉눈으로 보면 초라하고 스산해 보이지만 속눈으로 보면 엄청난 기감과 영성이 서린 곳이다. 정남향에 칠보산, 서북에 내장 서래봉, 고부 두승산, 동북에 모악산이 있다.

전임이신 고 양산 김중묵 종사, 법산 이백철 종사 두 분은 확신을 갖고 이곳에서 정진하고 적공을 쌓으신 분들이다. 또한 종사가 다섯 분이나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아산 김인용·문산 김정용·선타원 한제선·서산 이종진 원로교무님과 전타원 윤성규 정토님이다.

화해 꽃 바다는 속눈을 뜨고 찾는 사람에게만 펼쳐지는 성성상전의 자리다.

나는 태생부터가 인연이 곤고했다. 전무출신 서원부터 복을 사량 말고 짓기만 할 것이며, 평생 내 옷깃을 스칠 인연마다 최선을 다 하고자 노력했다. 금생 일을 보면 전생 일을 안다고 했던가. 내 일생의 거울을 보면서 호리도 틀림없는 과거 생을 읽는다.

내 나이 열여섯 겨울에 정산종사 열반 소식을 언니인 감타원 최순원 교무로부터 접했다. 당시 승타원 송영봉 종사가 인민군 토벌이 채 끝나기도 전 불안한 시국에 운봉교당에 오셨고, 언니는 그분의 추천으로 출가를 했고, 선원 공부를 마친 해였다.

나는 소상하게 전해주는 언니의 열반에서 발인 현장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없는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듬해 열일곱 나이에 입교와 동시에 출가를 했는데, 그때 입교 연원이 화해출신 선타원 한제선 종사(당시 운봉교당 부교무)였다. 화해교당에 와서 대종사님을 뵈온 고 견타원 라상운 정사, 송타원 송영희 정사와 시타원 유은정 정사, 진타원 강광선 정사 등의 신심과 공심이 큰 힘이 되었다.

그 중에도 고 익산 송익현 정사의 이야기를 빠트릴 수가 없다. 익산 정사는 촌노로 2남 4녀의 자녀들을 기를 때 노동으로 살면서 41년간 주무서열 제1 자리를 지켰고, 제우비 터도 이 분이 희사한 것이다.

이번에 성지 순례객 숙소를 겸한 생활관 터가 모자라 앞뒤 꽉 막힌 고민을 3년간 했다. 그러던 중 익산정사의 가족(부인, 북인천교당의 장남 송성광을 비롯 4남매 일원가족, 3녀 덕천교무, 장손녀 원남 보좌교무)이 살고 있던 집과 임야 100평을 내주어 불사가 이루어 진 것이다. 나는 이 분의 열반기념제날 고마움을 담아 기념문을 올렸다.

학교 인연으로 지금도 성원을 보내주는 이호섭 교수, 정두봉 선생. 유영배 선생. 박영지 선생, 김정화 교수, 유석자 선생, 서원주 교무들의 오랜 성원이 이제 부담이 되어가는 세월이 되었다. 모든 분들과 성스러운 인연 아름다운 만남이 축복으로 남는다. 끝으로 불사에 참여한 모현교당 이재희 설계사, 연지교당 이계열 사장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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