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하여(완)
조정중 원로교무의 영성 메시지

자살은 물질문명에서 파생한 사회적 병맥
공생공영 연대감 속에 은혜의 윤리 실천해야
회심 위한 대화와 시간·공간적 노력 제공

 

자살의 동기를 말할 때 절망과 염세를 들기 쉽지만, 실제 자살은 죽음의 찬미에서 비롯된다. 죽음은 나를 송두리째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 또는 죽음이 나를 영광된 처소로 옮겨 줄 것이라는 희망, 그것이 죽음을 예찬하는 간절한 소망이며 뜻이다. 그러나 자살의 주체인 나는 누구이며, 자살의 환경인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무엇인가를 밝게 알지 못하고 자살을 행하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나는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삶 때문에 생명을 아끼는 것인데, 오리려 삶 때문에 생명을 버린 사람이라면 얼마나 삶에 대한 회의가 깊은 것이며 정신적 고통이 큰 것일까.

자살한 사람이 구제를 받아 소생했을 때 소리치는 외침이 있다. "누가 나를 살려놓았는가?"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말로, 어떤 사회 제도로, 어떤 정신력으로 번져만 가는 자살 대열을 바른 방향으로 세울 것인가?

우리 인간은 본시 만법(천지만물)을 빌리지 않고 영성으로만 사는 독존(獨尊)의 삶과 영생의 삶이 있고, 만법을 빌어서 인간으로 사는 상생(相生)의 삶과 단생(單生)의 삶이 있다. 이 두 방향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는 삶을 '인격'이라 한다.

내가 광주에서 근무할 때 박태영 전남지사가 한강에 투신한 급박한 일이 발생했다. 한 사람의 지성인이 스스로 생명을 버렸다는 소식은 큰 충격을 주었다. 정몽헌 현대회장, 안상영 부산시장 등 한국 사회의 수장급 인사들이 자살로 일생을 정리했다는 비보가 있는 가운데 특히 30대 청년층의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보도는 충격을 더한다. 스웨덴처럼 자살 밀물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일게 한다.

자살은 경제 제일주의, 경쟁 일등주의, 차별 행복주의 등 온갖 물질문명의 유산으로 인하여 파생한 하나의 사회적 병맥이다. 그러므로 자살의 근본적인 치료는 사회의 부조리를 혁신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겠으나 사회를 혁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에 따라 자살 문제는 마치 치료 불능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중대한 문제이며, 어떠한 방법과 투자를 무릅쓰고라도 시정되어야 할 우선의 과제이다.

가깝게 일본에서는 자살을 '자결'이라는 의로운 이름으로 찬미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망했을 때, 그 당시 육군대신은 할복자결을 선택했으며, 일본의 문호로 알려진 노벨상 수상 작가 카와바다 야스나리 역시 자결로 일생을 마쳤다. 그들은 이것을 무사도의 정신이라고 예찬한다. 모든 자살 행위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옳지 못한 것이지만, 자살을 꼭 악덕시 하는 것도 옳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자살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자살 못지않게 정신적 큰 고통 속에서 "자살이라도 해버릴까?"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리는 대중의 문제도 함께 해결하는 묘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종교 또는 사회적 입장에서 그들이 자살을 선택하지 않도록 온 인류가 공생공영 하는 연대감 속에 은혜의 윤리를 훨씬 더 실천해야 한다.

말을 맺으며 자살율을 줄일 수 있는 방안 몇 가지를 우선 제안 하고자 한다.

하나는, 각 종교가 자살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위하여 전문적인 대화 창구를 상설로 열어 놓는 것이다. 또 그들이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이미 은혜의 전화며 사랑의 전화 등이 시행은 되고 있으나 통속적인 상담의 역할에 그칠 뿐 심도와 적극성이 부족한 편이다. 상대방의 경우에 따라서는 좀 더 정신력을 갖춘 분과 진솔한 대화가 필요하다.

"불보살들은 모든 중생에게 큰 희망을 열어주실 원력을 세우시고 세세생생 끊임없이 노력하시나니라"하신 요훈품 12장의 말씀은 자살자에 대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한층 새롭게 한다.

둘은, 자살에 임박한 사람이 세상에 대한 분노와 혐오, 염세와 좌절 등의 마음을 돌려서 정신적 평온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피경(避境)의 집을 제공하는 한편, 스스로의 정신력으로 새로운 출발의 생심(生心)을 세울 수 있도록 훈훈하게 보호해 주는 일이다. 자기 안에서 일어난 자해의 마음을 돌이켜 자기 안에서 회심(悔心)할 수 있도록 그에 적절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일이다.

셋은, 자살의 공포를 뛰어넘어 스스로 명을 끊었을 때 자기의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하고 죽음을 몰이해 하거나 또는 한 번의 죽음이 환상적인 극락이나 천상 세계에 문득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죽음을 쉽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바르게 깨우치는 일이다.

우리들 인간에게는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자살시킬 수 있는 권능이 본래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나의 숨길을 끊어도 나는 죽지 않고, 내가 '나'라는 한 생각마저 죽여도 나는 죽지 않는다. 우리의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며, 우리의 인생 과정은 인과의 수레를 맨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만 실력 있는 수도인은 그의 신앙력과 수행력으로 무명업(無明業)의 윤회를 돌파할 수 있는 마음의 자유를 갖추었기 때문에 능히 생사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을 뿐, 그 밖의 사람들로서는 스스로에게 생사의 권능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쳐야 한다. 만일 임의대로 자살을 자행한다면 그것은 자기 생명에 대한 반항이며 진정한 권능이 아니다. 또한 악도(惡途)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넷은, 대중 매체인 방송,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인격에 손상을 주는 근거 없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설혹 확실한 근거가 있다 하여도 당사자에게 재활의 기회를 상실케 하거나 사회 질서에 유익하지 못한 훼언 등은 엄격히 금하는 불문율의 도덕적 절제가 필요하다.

다섯은, 안락사의 허용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방향을 고려해야 한다. 노쇠와 질병으로 인하여 신체적 생의 조건이 본인에게 극단의 고통과 절망을 주는 경우라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안락사할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법적인 보완과 대중의 공인 받는 축복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인류의 삶을 구현하는 집단은 자살에 더 많은 배려를 기울여야 하며 이는 사회를 문명화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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