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명바위는 교단 최초의 금석문
교단 창립의 얼 새겨놓은 기념비

옥녀봉 기슭의 제명바위(왼쪽)와 재건한 제명바위.

가을이 깊어진 원기 93년(2008) 10월12일 오후, 옥녀봉 서쪽 언덕길에서 범산종사님(凡山 李空田)이 걸음을 멈춘다. 한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어 안내하던 나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종사님을 조금 쉬도록 해드리려고 앉을 자리를 찾는데, 연신 솔밭 저편을 바라다보며 높은 곳으로 옮긴다.

아차 싶어, 앞이 트인 곳을 찾아 솔가지를 제쳐드리니, 종사님은 등산용 스틱에 몸을 의지하여 망부석처럼 앞을 응시한다. 어느새 눈시울이 촉촉해진 종사님을 보면서 일행이 경건해지는데, 도수 높은 종사님의 안경 너머로 황금 들녘이 펼쳐져 있다. 소태산대종사와 구인선진 어른들의 혼이 깃든 영산성지의 정관평이다.

정관평은 정신개벽을 외치며 시작한 대종사의 구세(救世)사업에 먼저 공명한 구인선진이 영광의 해면을 막아 언답을 만드는 방언공사로, 일심합력(一心合力)의 위력을 나타낸 현장이다. 원기 3년(1918) 4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그러니까 3·1독립운동이 강토를 뒤덮던 원기 4년(1919) 3월 준공되었으니, 둑의 길이 1,632m이고 면적은 135,832㎡(41,089평)이었다. 이 역사를 상징한 것이 대종사십상 가운데 영산방언상(靈山防堰相)이다.
정산종사 당대인 원기 40년(1955) 10월부터 제2차 방언공사를 시작하여 원기 43년(1958) 12월에 준공을 하니 90,847㎡(27,481평)이다. 그러니까 지금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정관평은 1,2차의 226,678㎡(68,571평)이다. 근래에 이르러 일부에 연을 심고 석교를 가설하여 고즈넉한 영산성지에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생각해보니, 첫 방언 역사는 정묘(1927)생인 범산종사가 나기 8년 전의 일이다. 영광 묘량면에서 나서 2살 때에 할머니 등에 업혀 대종사를 처음 뵈었으니, 대종사의 대각(大覺)과 방언역사 등은 아마도 생애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을 듯싶다. 그러기에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리고, '제명(題名)바위'로 향하는 일행은 이미 교단 초창기로 돌아가 있다.

말씀 끝에 여쭈어 본다.

"방언공사를 마치고 그걸로 끝내셨을 텐데, 어떻게 바위에 시멘트를 발라서 이름을 새겨 넣을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 때, 우리 한국사람들끼리 이만한 일을 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여. 일제(日帝)의 경계는 삼엄하고, 노래 소리는 나고 하니 급하고,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 드리자'고 하셨지. 방언 일을 겨우 끝을 내셨는데, 아홉분이 모여 앉아서 이런 큰일을 했으니, '우리 어디다가 비석이나 하나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

"아홉분 중에 정산종사님도 계신가요?"

"정산종사께서는 토굴에 계실 때여. 공기가 삼엄하던 시절에, 경상도 말씨를 쓰고 얼굴이 깨끗이 생긴 양반이 계시니, 토굴 속에 감춰두셨지. 그때는 비석하나 세우면 동네잔치를 해야 했으니, 한 살림 들어갔지. 감히 비석하나 세울 여력이 없던 시절이라 고민하고 있는데, 칠산(七山 劉巾)선진이 '좋은 수가 있습니다. 수리조합 댐 공사를 마치면 수문에 회를 발라놓고 표지를 하니, 우리도 정관평을 내려다보는 바위에 누구누구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냈다는 내용을 새기면 100년을 못가겠습니까'하는 의견을 내셨다고 정산종사께서 말씀하셨어. 칠산님은 돈지(頓智)가 있으셨는데, 좋은 의견이라 채택되었고, 원기 12년 총회에서는 '좋은 의견냈다'고 시상도 했지."

원불교의 의견제도가 그때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의견이 통하고 받아들여지는 소통은 열린 조직의 기본일 터이다. 그 역사현장에서 100년에 가까운 '제명바위'를 본다. 5, 6m의 바위 위에 새겨진 원형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는데, 종사가 원불교문화원장 시절인 원기 75년(1990)에 탁본하여 오석(烏石)에 복원해 새기고, 그 아래 재건문을 역시 오석에 새겨 놓았다.

원문은 한문 해서(楷書)인데, '영광 백수 길룡 간석지 양처 방언조합 조합원 박중빈(朴重彬) 이인명(李仁明) 박경문(朴京文) 김성섭(金成燮) 유성국(劉成國) 오재겸(吳在謙) 김성구(金聖久) 이재풍(李載馮) 박한석(朴漢碩) 대정(大正) 7년 4월 4일 시(始) 대정 8년 3월 26일 종(終)'이라 하였다.

대종사와 구인선진의 이름이 속명으로 새겨져 있고, 법호에 의한 순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정이라는 일제의 연호 역시 당시 사회상을 말해준다.

재건한 비문은 국한문을 혼용한 제명을 '정관평 방언조합 제명바위'라 전서(篆書)하고 해서로 이렇게 적고 있다. '정관평 방언마친 조합원들 가난 때문 석비 못세우고 이 바위에 양회(洋灰)발라 제명하니 새 회상(會上) 첫 금석문(金石文)이다. 그러나 긴 세월 지나 회면균열(灰面龜裂) 시작되고 길은 숲에 묻힌지라, 글은 탁본하여 오석에 새기고 길은 조경하여 새로 내었노니, 후인들이여, 우리 함께 여기서 간고(艱苦)했던 초창기 거듭 새기고 의연했던 창립 혼 길이 기리자. 원기 75년 8월 원불교 중앙문화원 범산 이공전 찬, 이산 박정훈 근서, 과산 김현 공감'

 

범산종사의 원력으로 시멘트를 발라 공사내역을 적었던 어려운 시절에 보여준 창립정신이 몰록 드러나 있다. 새로 새겨진 제명바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혼잣말처럼 외운다.

"저 시절이 내 환갑이었는데, 축하금 모아 환갑기념사업으로 한 것이여."

8순을 어느 사이에 넘긴 대종사의 직제자를 모신 이 걸음이 어찌 이제야 이루어졌는가. 사진 촬영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모시고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다시 일제시대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차에 오른 범산종사는 가볼 데가 있다며 '최일양대 묘소'이야기를 꺼낸다.

대종사 법설 중의 인과법문(因果法門)에 등장한 대표적인 예화의 인물이다. 초창기 잡지인 《회보》46호, 그러니까 원기 23년(1938) 7·8월호에 김형오 선진이 '영광 구수미 최일양대의 복 받은 이야기'에 자세한 내역을 적고 있다.

영산성지인 길룡리에서 법성포 쪽으로 10리 쯤이 구수미마을인데, 200년 전쯤에 홀로 살며 객주집을 경영하는 여인이 있었다. 천성이 착한 그녀는 내왕하는 손님들에게 밥을 팔며 옷가지나 신발을 공들여 빨고 제공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특히 불심(佛心)이 장하여 스님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어느 스님이 준 이름이 최일양대인데, '최일향대(崔一向臺)'였을 것이라고 범산종사는 말한다.

그녀는 마침내 유산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세상을 떠나자, 동네 사람들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향례하였는데, 100년쯤이 지난 후 영광군수 부인이 스러진 묘 앞에 예를 올리게 되었다.

조악손이었던 처녀가 군수 부인이 되어 손이 펴졌는데, 손바닥에 '영광의 최일양대'라 쓰여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본 그녀는 묘소를 찾게 되었고 적선(積善)한 삶이 후생에 걸쳐 복을 받았다는 소문이 근동에 자자했고, 대종사에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범산종사는 '제명바위' 재건비를 세울 때 어렵사리 확인하여 묘역을 갖추고 영산교당 박재운회장 도움을 받아 비석을 세웠다. 내친 김에 박회장을 일터로 찾아 반가운 만남을 갖고 함께 현지로 가 보았더니 골프장으로 묘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관리사무소를 찾았더니 유해를 수습해 화장하여 목포의 보현정사에 안치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현장을 찾았더니 다행하게도 안내표석이 남아 있다.

'구수리객주보살 최일양대묘 300m↑'

안도하는 종사를 차로 모시면서, 초창기교단에 훈훈한 인정을 심어준 그녀가 자꾸 선진어른처럼 그려지는 것이었다.

제명바위에서 바라 본 정관평 황금들판.
글 · 양현수 교무(원광대 대학원장)
사진 · 황인철 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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