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그리움을 엮은 조각보

조각보 잇다보면 아다지오 템포 시작
조상들의 생활공간 창살과 발

 

 

그냥 무덤덤하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인생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타이틀보다 내 이름 석자를 찾고 싶은 것도 욕심일까? 비록 시작은 복식을 연구하는 어머니의 전시회를 빛내드리기 위해 규방공예를 접하게 되었지만 '꼭 무엇을 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신념보다 아주 미약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어머니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했다.

복식공부를 하고자 원광디지털대학교에 입학 한 것도 아주 큰 계기가 되었다. 학부에서 얻어지는 인문학적 교양과 미래로 향한 비전, 그리고 전문지식은 해를 거듭할수록 내게는 창조적 산물이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내 삶을 열정적으로 디자인했다.

우리의 색깔에 푹 빠지기 시작한지 몇 년,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색들을 물들여 가면서 온갖 상상의 나래 속에서 새로운 작품들이 탄생했다. 어느덧 나는 우리의 규방문화를 알리는 멋진 전도사가 되었다.

‘아주 느린 템포로 곱게 천연염색을 한 모시조각들을 이어보셨나요? 그렇게 두 가지 색깔의 조각천을 잇고 나서 다른 조각천을 또 이어가고….’ 이렇게 천천히 잇다보면 아다지오라는 멋진 템포가 나오기 시작한다. 아다지오란 안단테와 라르고의 중간 속도로 진행되는 음율이다.

벌써 내 나이 쉰 중반. 이제는 모든 일상의 삶을 쉬엄쉬엄 느린 템포로 가고 싶다. 요즘처럼 바쁜 디지털 세상에서 느릿느릿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내 삶은 어쩌면 그동안 헛되이 살아온 지난 날에 대한 미안함 인지도 모르겠다.

한 땀 한 땀을 정성스레 바느질을 고집하며 옛 여인의 흉내를 내는 것 역시 시대조류에 맞지 않는 지루한 수행 같아 보이지만 내딴에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진정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면 내 몸에서 자꾸만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의 삶의 전부였던 바느질…. 이제는 전수를 받아야 하는 나의 삶에서 침선(針線)은 예술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탄생하면서 새롭게 재창조된다. 한 땀 한 땀 그리움을 실은 조각보가 그렇다.

 

 


옛 여인들은 조각보를 만들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외부의 방해 없이 천 조각들을 이어가며 꿈과 희망을 그려보고 못 이룬 꿈도 펼쳐보는 삶의 도화지가 아니었을까?

분명 그녀들의 작은 꿈과 소망과 절망이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보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그토록 정성스레 만든 조각보에 복(福)을 싸고 인내(忍耐)를 싸고, 또 예(禮)를 쌌던 것이다.

옛 여인들의 마음을 스스로 닮다보면 진정한 내면의 멋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 가게 되는데 그 온화하고 평온한 마음상태는 이내 겉으로 표현되어 다른 이에게는 순수하고 아름답게 전달이 되어지곤 한다.

그것은 바로 깨알만한 바늘땀에 담겨져 있는 작은 신비같은 것이다. 그리움과 감사와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는 조각보.

이 조각보를 조금 크게 만드니 우리의 생활 속에서 미의식과 정서를 표현해 낼 수 있는 발(廉)이 되었다.

어느덧 보이지 않는 상상의 힘은 시공을 초월해 반짝이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다가와 나를 자꾸만 설레게 한다. 한국인이면 모두가 다 추억하는 한지 창살문, 그리고 그리움. 포커스를 그리움으로 맞추니 훨씬 쉬워졌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일조량이 풍부한 한국의 풍토에서 우리 조상들의 생활공간에 친근하게 자리했던 창살과 발(廉).

이들을 연관 지어 각각의 의미를 조망해 보면서 우리의 전통 침선 기법을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발(廉)작품을 디자인하고 제작해 보았다.

나무로 깎아 만든 창살도 나무 올거미도 모두 자연염색이 된 모시나 생초가 주 소재가 되어 그 안에 나의 추억과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낸다.

띠 살 문양, 아(亞)자 문양, 만(卍)자 문양, 빗살 문양 그리고 사찰의 꽃살 문양 등 모티브를 찾아내고 창살과 문살 꽃살들이 주인공이 되는 발을 만들어 전시회를 했다.

 

 


전시회를 하는 동안 이제는 내게도 우리 주위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해 찾아 낼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이 생겼음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길조의 의미를 가진 다양한 문자나 기하학적 문양을 담은 새로운 조각보인 발. 발을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권한다. 커텐 대신 우리의 멋스러운 발을 드리우자고….

발을 드리운 창가의 은은한 정취를 '창의 작은 떨림'이라 표현하고 첫번째 전시회의 도록의 마지막장 에필로그로 실린 글을 올린다.

‘창의 작은 떨림/ 여기를 봐/ 아직도 그대는 꿈이 청명해?/ 난 말야/ 시나브로 흐릿해지지만/ 세월을 탓하지 않아/ 늘 소소함에 행복이 움튼다고 믿거든/ 차라리 도란도란 속삭이는 작은 것이/ 오십이 넘으니 잘 들리고 잘 보이던데/ 뜨거운 열망은 애시당초 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리없이 사라지는 소멸은 싫었어/ 보폭이 느릿하고 작게 건너지는 틈새에 숨은 소망/ 그것을 그대에게 아주 조용히 말하고 싶었어/ 그렇게 내 사랑 법은 작게 안을거야/ 오래도록.’

◀ 신경희 교도

◀ 신경희 교도
해림공방 운영
규방공예 전문가
한국복식과학재단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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