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품처럼 푸근하고 따스한 곳

부뚜막 이용한 음식문화와 취사방식
솥걸이·아궁이·굴뚝의 삼위일체는 바로 과학

 

 

작년 가을 갑작스레 미국 워싱턴에 있는 모 방송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내용인 즉 한국의 부뚜막에 대한 취재과정에서 마침 부뚜막과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고고학자가 있다기에 관심이 있어 인터뷰를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고고학' 하면 모두들 금관이나 캐고 인디애나 존스처럼 보물을 찾는 줄만 알지 부뚜막이나 음식문화를 연구한다고 하면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이처럼 관심을 가져주니 어찌 감격하고 응해주지 않을 수 있으랴….

부뚜막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의 품처럼 푸근하고 따스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직접 밥을 짓거나 목욕물을 데우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젠 적지 않은 연륜을 가진 분들일 것이다. 그만큼 부뚜막은 싱크대와 가스렌지에 밀려 사라져가는 우리의 주방문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부뚜막은 부엌의 벽면에 잇대어 설치되며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음식을 만드는데 쓰이는 취사시설이다. 그 구성은 직접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솥을 거는 솥걸이로 나뉘며 천정의 윗면을 편평하게 만들어 그릇이나 음식재료들을 올려놓기 편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부뚜막 풍경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집집마다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뚜막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부뚜막을 사용하기 이전의 선사시대 사람들은 음식을 만드는데 '노지(爐址)'로 불리우는 화덕을 사용하였다. 이 화덕은 방바닥을 약간 파내거나 둥그렇게 돌을 돌려놓고 그 안에 불을 피우는 아주 간단한 형태였다. 마치 캠프파이어를 할 때 나무 주위로 돌을 돌려놓은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화덕은 부뚜막에 비해 땔감의 열효율도 낮았고 만들 수 있는 음식의 종류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궁이처럼 불길을 막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화재의 위험도 높아 부뚜막이 보급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부뚜막은 중국에서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서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약 2,000년 전으로 함경북도 회령의 오동유적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우리나라 전지역에서 일상적인 취사시설로 부뚜막이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의 부뚜막이 지금과 다른 점은 주로 움집의 방 안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움집의 구조가 방과 부엌이 따로 구분되지 않으므로 방 안에 부뚜막을 설치하여 여기에서 밥도 짓고 잠도 자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밥을 지을 때 발생하는 연기는 모두 벽면을 따라 빠지는 동시에 방이 따뜻해지도록 외줄고래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난방형태는 지금처럼 방바닥을 데우는 것이 아니라 벽을 따라 설치된 고래의 열기로 방을 데우는 방식이다.

삼국시대에는 밥을 지을 때 지금처럼 바닥이 넓은 무쇠솥 대신 마치 고깔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토기솥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토기솥이 걸리는 아궁이의 바닥에는 돌을 세워놓아 토기솥을 떠받치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토기솥에는 무쇠솥처럼 부뚜막에 걸쳐도 솥의 하중을 지탱할 만큼 튼튼한 전(솥의 옆으로 날개처럼 돌출되어 부뚜막 위에 솥이 걸쳐지게 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쇠솥을 사용하기 이전까지는 바닥의 돌로 솥의 하중을 지탱하게끔 하였다. 이런 이유로 삼국시대의 부뚜막은 후대에 비해 아궁이의 천정구조가 매우 약하다.

삼국시대에는 지금의 부뚜막처럼 여러 개의 아궁이가 옆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여러 개를 두는 형태였다. 이렇게 하면 하나의 아궁이에 불을 지펴도 한꺼번에 여러 개의 솥을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웃하는 중국과 일본의 부뚜막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는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 방식이 오랫동안 쓰였던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사라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이제 부뚜막이 구들과 연결되어 아궁이는 짧아지고 방바닥 아래로 고래를 길게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개의 솥을 앞뒤로 거는 대신 여러개의 아궁이를 옆으로 설치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지금과 같은 쇠솥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솥의 무게를 떠받치는 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대신 솥의 하중이 받침돌 대신 아궁이 천장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아궁이의 구조는 더욱 튼튼해졌다. 그리고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부뚜막에서 이어지는 고래의 수가 늘어나게 되어 점차 방바닥의 절반 정도까지 구들이 설치되었다. 마침내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이제는 방 전체에 구들을 설치하는 전면난방이 보편화 되면서 현재와 같은 부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세계의 음식문화는 화덕의 형태와 이용방식에 따라 '부뚜막 문화권'과 '오븐 문화권'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특히 부뚜막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문화는 한중일 삼국의 독특한 취사방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동남아 등지에서 보이는 화덕도 부뚜막과 유사하지만 솥걸이·아궁이·굴뚝의 삼위일체를 통한 솥의 고정과 화력조절 그리고 연기배출의 편이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아궁이 내부에 불길을 최대한 머물도록 하여 솥에 열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연기를 모두 밖으로 배출시키는 점은 매우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부뚜막이 비록 중국에서 전래되었지만 나중에 구들과 결합하여 중국·일본과는 전혀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좌식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부뚜막은 이제 우리 곁에서 흔히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한국인에게는 마치 고향의 따스함 같은 아련한 정서를 가지게 해준다.

오진성 교도
    (한강문화재 연구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