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만 한다고만 하면 된다, 쉽다

일원의 절대 자리를 알기가 어렵고, 일원의 진리를 실행에 부합시켜 동정일여의 수행을 하기 어렵고, 일원의 진리를 간명하게 깨우쳐 알려주기 어렵다고 하셨다.

다시 풀어 말하면 진공의 자리 즉 있는 것을 놓고 없는데 까지 보이는 것을 놓고 보이지 않는데 까지 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있으나 없으나, 보이나 보이지 않거나 한결같이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인데 유무초월·동정일여·내외일여·시종일여의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령 내가 알고 보이고 행하고 있다할지라도 간명하게 설명하여 깨침을 주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안다고 해서 다 실행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로는 알지만 그 실행이 어렵다. 깨침도 깨침이지만 깨친 후 그대로 수행하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이런 법문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견성은 다 집에서 하고 올 것이며, 참다운 스승 만나 성불하러 여기로 올 것이다."

여기서 깨우쳐 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기는 하지만 '아! 그것이 진리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그 간명한 한마디를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김치 맛을 상대가 직접 맛볼 수 있어야 깨우쳐 아는 것이다.
비록 나는 그 맛을 알고 있을지라도 설명으로 할 수 없는 그 맛을 깨우쳐 알려 준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법문을 견성, 성불, 제중의 이야기로 대치해 본다. 견성하기도 어렵고 성불하기도 어렵고 제중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견성도 성불도 제중도 하려는 사람에게는 길이 열린다. 하려고 맘먹으면 된다. 쉽다.

대종사님께서 하려는 사람 나도 어찌할 수 없고,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또한 어찌할 수 없다는 법문을 하셨다.

이 말씀은 하려들면 쉽다는 말이다. 바로 된다는 이야기이다. 부처는 5백생을 닦으셔서 부처가 되었다면 나는 5천생을 닦으리라. 일각 백각 천각 만각 무량각···. 하고 또 하면 된다는 대산종사의 법문이 생각난다.

"쉬지만 말아라. 멈추지만 말아라."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