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疏通)의 시대, 교단과 사회를 생각한다

"소태산대종사의 최초법어 중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에는
강자와 약자가 겸허하게 서로 소통하여
상대를 함께 진화시켜 가자는 탁월한 경륜이 있다."

▲ 종교인 생명·평화 100일 순례단 2008년 3월25일 천지보은회 주관으로 창녕군 남지읍 남지체육공원에서 열린 기도식을 통해 출가교역자들이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계획 중단을 촉구했다.

본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시대의 '소통'을 주제로 4주에 걸쳐 게재하고자 한다.
이번호에서는 ▷ 교단과 사회의 소통에 대해 이덕천 교도(김해교당)
                           ▷ 2주 교정원과 교당의 소통에 대해서는 정세완 교무(광주전남교구)
                           ▷ 3주 교무와 교도의 소통에 대해서는 이면우 박사(구로교당)
                          ▷ 4주 가족간의 소통에 대해서는 김정현 교도(도봉교당)가 각각 맡았다.

요즘 만큼 '소통'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던 시대는 예전에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소통'이 잘 안되는 현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럴수록 '소통'이 절실히 필요해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사전을 찾아보면 '소통(疏通)'은 '막히지 않고 잘 통함. 뜻이 서로 잘 통하여 오해가 없음'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 인간관계에서는 '일방적인 전달이나 지시, 명령관계가 아닌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고 상통하여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상태가 될 때' 이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우리 집안에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아이들에게는 퍽 무서운 분의 이야기이다. 이 분은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능력이 있어 집에 많은 돈을 벌어왔고 친척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데, 이 분은 퇴근하여 집에 와서 자녀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다가도 아이들이 무심결에 뱉은 농담 하나를 갖고 "뭐시라?" 하면서 눈을 부라리며 집이 떠나가도록 호통을 치는 바람에 그 집의 자녀들은 항상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고 긍정하는 대답 외에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집에 아버지가 없는 시간에는 편하게 지내다가도 아버지가 퇴근하고 오면 긴장을 하는 것이 단단히 훈련되어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최근의 한 중학교 교장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최근 '학교에서 핸드폰 소지 금지, 수업시간에 핸드폰 보이면 뺏는다' 등의 쉽게 볼 수 있는 '지시'에 반대하고, 학생이 학교에 얼마든지 핸드폰을 갖고 오지만 처벌이나 규율로 정하지 말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게 사용하도록 교사들이 잘 지도하여 학생 스스로가 핸드폰의 올바른 사용을 생활 속에서 익혀가도록 대화하고 설득하는 지도를 해야 올바른 교육이라는'소신'을 갖고 실천하는 분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의 그 어른과 자녀들 사이는 서로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두 번째 이야기에서의 교장선생님이 추구한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는 소통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진지하고 가치있는 관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진정한 소통'은 특히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높고 강한 지위에 있는 사람의 자세와 노력이 필수적인 일로 보인다. 물론 약하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소통'을 실현하고자 단결해서 힘을 모아 요구하고 싸우기도 한다.

결국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강자와 약자들 간의 노력, 즉 역지사지해서 상대의 위치에 가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양보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사회에서 소통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회는 즉 일방적이고 경직된 관계가 주된 사회는 구성원간의 갈등과 대립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고 오해와 투쟁이 일어난다.

그런 비민주적인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에너지가 충만하게 발휘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통이 잘 되는 사회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소속감과 책임감, 공동운명체 의식이 강하여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즐겁게 발휘하는 사회이다.

우리 민족의 수난기, 식민지 시대에 궁촌 벽지의 약자들 속에서 제생의세의 가르침을 시작한 우리 원불교의 '교단 안팎에 대한 소통'은 어떠할까?

창교시기에는 창교주와 제자, 민중들간의 소통은 매우 신선하고 긴밀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창교가 되지않기 때문이다.

교단 초기에는 창교주와 제자와 민중들이 그야말로 일심동체가 되어 단결하고 열심히 일하여 교단을 키워간다.

그러다가 사람과 재화가 모여서 종교집단이 커짐에 따라 교단 자체가 사회적으로 강자가 되는 때가 있다.

문제는 이렇게 강자가 되면서 나타나는데, 무엇보다 종교는 현재의 민중들과 사회를 '구제해야 할 대상, 가르쳐서 끌고가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수직적인 관계를 가지려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많은 종교의 과정들은 종교가 사회를, 종교지도자가 민중들을 대상화하고 훈화하여 이끌어가려 했던 예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종교지도자 스스로가 자신이 깨달은 바 자체가 '한계와 무지와 겸손'임을 알고 더욱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민중들과 함께 지혜의 길로 가는 노력을 하는 '겸허한 현자(賢者)', '헌신적인 종교개혁가'들이 많이 나타났던 것이 종교의 역사이다.

우리 원불교는 어떤 상황일까? 강자의 위치에서 사회와 민중들을 대상화하고 있을까, 아니면 민중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내려가서 '소통' 하고 있을까?

이와 함께 우리 교단 안에서도 높고 강한 권한을 가진 위치에 있는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와의 차별이 없이 서로 잘 소통하고 있는지, 강자는 겸손하게 일하고, 약자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고 잘 참여하고 있을까? 깊이 검토해 볼 일이다.

필자는 지난 세월 동안 재가교도에 대한 출가교도의 일방적인 관계, 평범한 교도에 대한 사회적 위세와 재력을 가진 교도의 일방적인 관계, 교단 조직내에서의 높고 강한 지위에 있는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로 인한 불만과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교단의 기성교단화'가 우려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꼭 필요하고 어둡고 낮은 부분에 원불교 교단이 없을 때에는 우리 사회의 소통에 대한 교단이 자각과 참여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교단에는 초기부터 벽지의 농민들과 함께 땀흘려 일해온 역사가 있다. 소태산대종사가 직접 설파한 최초법어 중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에는 강자와 약자가 겸허하게 서로 '소통'하여 상대를 함께 진화시켜가자는 소태산대종사의 탁월한 경륜이 있다.

우리 교단에는 그동안 어려운 조건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해오신 분들의 희생과 수고가 있다. 그 분들의 희생과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이덕천 교도ㆍ김해교당 / (사)평화의친구들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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