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도인 교도·약대교당(논설위원)
하나의 세계를 향한 하나의 신문, 원불교 신문의 40년을 먼저 축하한다. 신문은 그 사회를 보는 거울이다. 특히 종교 신문은 그 교단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사회의 신문은 좋은 면을 볼 수 있고 어두운 사회에서 밝은 기사를 본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거기에서 종교 신문이 가지는 특이성과 어떤 면에서는 다른 저널리즘(journalism)들이 하지 못 할 일을 과감히 해 내는 커뮤니케이션 역할을 가장 공정하고 인간적으로 할 수있는 매개체가 바로 종교 신문이다.

필자는 젊은 시절 신문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늘 내 등 뒤에는 덩치가 씨름 선수 같고 눈빛은 찬 바람이 도는 어떤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논설 회의에서도 조금 그 실정에 맞는 사진이 작게 나온다든지, 사설의 논평이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즉각 논설회의의 가치는 무산되고 다시 회의를 해야 하는 그런 시절을 보면서, 힘 앞에 정필의 논리가 얼마나 가엾은가를 직접 눈으로 본 슬픔이 있다.

교단 신문도 정필의 논리가 악필이라는 너울을 쓰고 감추어지는 법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교단 역사의 기록자로 교단사 변화와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보고가 곧 원불교 신문이다. 원불교 신문의 역할은 재가출가, 남녀, 선후진이 일직선 상에서 함께 정정당당하게 대화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사랑방 역할을 하는 매개체임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특히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주간으로 나오는 원불교신문은 교단의 발전된 모습, 공심으로 헌신하는 공도자들의 비우는 모습, 닮아가고 싶은 마음이 늘 파도치게 하는 힘이 있다.

아무리 큰 나무도 생명을 잃으면 썩어 넘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풀이라도 생명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떠한 재해라도 이겨내고 꽃을 피운다. 이것이 생명의 비밀이며 그 생명의 비밀에 의해 삶의 길이 열리는 비법이다. 생명의 비밀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찬란한 싹을 피워서 빈 땅을 숲으로 덮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겠지만, 그 속에서 죽은듯 살아 있는 생명을 어찌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신문이 진정 가야 할 길은 그 싹의 원동력이 되는 정당하고 편향되지 않는것이 무엇인지….
시대의 변화와 세대의 변화를 잘 관찰하며 가는 것이 원불교 저널리즘의 역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든 변화하지 않고 고여 있는 곳은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다.

어느 칼럼에서 읽었던 독수리 일화가 생각난다. 독수리가 80년을 살려면 40년쯤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고 한다. 독수리가 40년쯤 됐을 때 부리는 굽어 가슴을 파고 들고 발톱은 굽어 사냥을 할 수 없기에 피나는 변신을 해야한다. 자신의 부리를 으깨 새 부리가 돋아나면, 그 부리로 발톱을 뽑아낸다. 새 발톱이 돋아나면 독수리는 제2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이 걸어가야 할 인생을 생각해 보게 한다.

생명을 가진 인간의 오감을 옳은 곳에 놓을 수 있도록 영성을 맑혀주는 모든 미디어 매개체들도 시대의 변하는 조류에 따라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원불교만이라도 비록 물질이 빈약하나 수도의 길을 정도로 갈 수 있도록 정확하게 밝히고, 약한 자들의 마음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저널리즘이 돼야한다.

우리는 혹여 전무 후무한 슬로건을 내 걸고 입으로만 마냥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부터도 개벽을 피눈물나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앞에 신문의 공정하고 맑은 글은 우리를 개벽으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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