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과 세상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 해야"

원불교 언론 기틀 확립에 기여한 지나온 40년
개교 100년 위상에 걸맞는 역할에 최선 다해야

본지가 올해 창간40주년을 맞이했다.
타블로이드 판으로 발행된 청년회보의 정신을 이어받은 본지의 창간 정신은 현재에도 맥맥이 흐르고 있다. 지난 역사는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나침반이요, 거울이며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혈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원로원에서 만난 김정용 원로교무는 최근 나온 본지를 들춰보며 감회에 젖는 듯 했다. 그가 원불교청년회보에 이어 본지 초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느꼈던 기억 때문이리라.

"다른 신문은 큰 제목만 보고 버려도 원불교신문은 다 읽는 편입니다. 많이 발전했다는 느낌을 가져요."
김 원로교무는 본지의 지난 역사와 방향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청년회보의 창간과 그 당시 상황은
"원기49년 원불교청년회가 재결성된데 이어 원기50년에 제가 2대 청년회장이 됐죠. 부회장에는 조정근 교무(전북)와 강을성(서울), 조경원(경남) 씨가 선출됐어요. 이를 통해 청년회가 활발한 교화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이런 상황들을 전국청년회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 거죠."

그러나 청년회보가 있어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지만 경제적인 뒷받침은 따르지 못했다. 그러다 김 회장이 출판경비 14만원을 선뜻 내 놓게 되면서 힘을 얻게 됐다. 이를 계기로 다음해 9월 청년들이 염원하던 원불교청년회보가 창간하게 된다.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청년회보를 낼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질 못했어요. 총부에서는 회보를 만들 경제적인 여건과 또 그런 위치의 사람이 없었어요. 제가 대학에서 교무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저보고 회장을 맡아서 운영을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학교 일에 전념해야 했고, 총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몰라 사양을 했죠. 회보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 더욱 사양했지요. 그러다 실무는 주간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운영책임만 맡아 달라고 해서 조건부로 승낙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운영책임을 맡았어요.

조정근 교무가 청년회보 주간을 담당하면서 이끌어 갔어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개척한다는 사명감과 희망을 가지고 일했죠. 청년회원은 물론 교단적인 반응과 사회적인 반응도 컸어요."

김 원로교무는 1966년(원기51) 9월15일 '원불교청년회보'가 6면 타블로이드판으로 창간되고 월간으로 발행된 상황을 설명했다.

-원불교청년회보가 원불교신보로 발전하게 된 배경과 창간 의의는
"원불교청년회를 대표하는 기관지인 원불교청년회보는 처음에 청년회의 다양한 소식과 비전을 제시하고 계몽적인 운동을 알리는 순수한 소식지로 탄생하게 됐어요. 원고를 받을 때도 그런 입장이었어요. 강연과 좌담, 신앙수기, 수필, 시에도 그런 의지가 묻어 있어요. 원불교 전체를 알리는 내용들이 기사화되고, 공지사항들을 실었으니 교단에서 진행하는 교화 활동상황을 대행하는 회보가 된 셈이죠. 이로 인해 청년회원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는 계기가 되었고, 청년교화에 시너지 효과를 발하게 되었어요. 아쉬웠던 점은 청년회보가 월간으로 나왔기 때문에 구문이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일을 시작해서 결과가 다 나왔는데 회보에서는 이제 시작하고 있다'는 좀 멋쩍은 일들이 기사화 되고 그랬죠. 그래서 주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게 되었고, 이후 2년쯤 지나 점차적으로 원불교신문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어요. 또 반백년 기념대회를 앞두고 교단의 대사회적인 관계나 시대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청년회보와 잡지로는 교단을 대표하는 언론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요. 교단의 지도부에서도 교화촉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우선 격주라도 신문이 나와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변화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뒤 원기54년 3월 '원불교신문발간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원의회에서 공식적인 언론인 원불교신문을 간행하기로 의견을 모으게 된다.

"원불교신문이 그냥 창간된 것이 아닙니다. 대종사님 재세시부터 '월말통신' '월보', '회보', '원광'을 발간하는 등 언론에 대한 관심이 많았죠. 그리고 청년회보라는 과정을 거쳐서 교단의 형편과 위상과 시기를 볼 때 신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거죠. 4년 만에 '원불교청년회보'를 폐간하고, 1969년(원기54) 6월1일 '원불교신보'가 교화촉진의 사명을 가지고 8면 타블로이드판으로 역사적인 창간을 하게 돼 교단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언론이 시작 됐어요. 사무실은 구정원에 있었죠."

-요즘 신문을 보시면서 느낀 점은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비해서 지금은 '하늘과 땅'이죠. 어렵게 출발한 원불교신문이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4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원불교신문을 살펴보니 '그 당시 어려웠어도 시작하기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청년회보를 계기로 해서 원불교신보로 이어 신문이 나왔기 때문에 회보와 신보를 운영해준 역대 사장과 임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제가 신문사 사장을 그만둔 뒤에도 신문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합니다. 신문사측에서도 교단의 여러 일들에 대해 상의를 해 올때 보람을 느낍니다. 한 번은 8면에서 컬러도 하겠다고 하더니 이젠12면과 16면으로 늘리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지면이 늘고 독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 온 거죠. 결과적으로 신문이라는 것은 독자가 많아야 합니다. 독자 없이 신문을 찍어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독자가 어느 정도 불어나서 여건이 좋아지니까 지면을 늘리겠다고 하니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니 어찌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또 다른 의미로 보면 '교단도 그만큼 성숙해가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기관과 교당에서도 신문을 통해 교화 활성화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 본지에 대한 바람은
"원불교신문은 기관지적 성격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신문을 기관지적 성격으로 위축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이슈의 사건이라도 '교화발전에 저해되는 기사를 실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원불교신문이기 때문입니다. 원불교신문은 원불교의 교리와 사상과 예법 등을 온 누리에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교법에 의해 마음공부하고 인격이 함양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일반 사회의 신문은 소소영령하게 알 권리를 알리는데 주력하지만 원불교신문의 역할은 다릅니다. 교도들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을 알리면 그것보다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원불교신문'을 보면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성숙되고 어른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제가 초창기 사장으로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40년이라는 세월동안 발전해오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고맙게도 지금까지 신문사에서 변화되는 상황을 알려주니 기쁨도 같이 하지요. 컬러도 있고, 지면도 늘어났고 전면광고까지 나와서 좋아요. 사람도 사십이 되면 중년이고 한창 일할 때인데 그런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100주년 행사를 앞두고 원불교 위상이 올라가는 만큼 원불교신문도 따라서 올라갈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밑바탕에 원불교신문이 가교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교화대불공이 활성화 되도록 역점을 두어야 겠죠. 원불교신문이 비약한다는 것은 주간에서 일간으로 발전 하는 것도 있겠지만 현재에서 더 충실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갑자기 잘 하려고 하면 안돼요. 신문사가 점차적으로 잘 해온 것처럼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이것이 초대사장으로서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요즘 근황과 관심 가지고 있는 일은
"원로원에서 쉬면서 후생 일을 준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익산미륵사지에서 500여점의 국보급인 사리장엄구가 발굴된 것과 왕궁 터와 관련해 익산을 새롭게 조명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히려 마백연구소장으로 있을 때 보다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요. 익산 문화권에 대한 초기의 연구가 이제 결론을 내리고 평가를 받게 돼 기쁜 일이고 보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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