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스승님, 그 성안이 그립습니다"

원불교와 함께한 기적같은 생명과 서원의 세월
스승님 은혜 속에 보은하며 사는 삶
그 크신 경륜과 유훈 ··· 교화대불공으로 매진해야

대산 김대거종사가 교단에 펼쳤던 경륜과 유훈들은 큰 산이 되어 후진들 가슴에 남아 든든한 지표가 되고 있다.

이에 본사에서는 6월 추원보본의 달을 맞이하여 대산종사가 남겨놓은 경륜과 유훈들을 재가 교도들의 추모담을 통해 성현에 대한 추모의 정을 되새기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교단의 큰 산으로 살다 가신 대산종사. 그 어른의 일거수 일투족은 열반한지 11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교단의 재가출가에게 맥맥이 큰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누구보다 대산종사와의 지중한 인연으로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 개봉교당 김원도(70·호적명 평수·와이즈비젼 회장) 교도를 만나 우리가 지키고 추구해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새겨보았다.

김 교도는 대산종사와 어떤 인연 때문이었을까. 이른 나이인 16세에 누구의 권유도 없이 원불교와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20대 초반인 원기47년 10월 대산종사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전라북도 주최 직장인 단체 도민 친선배구대회가 열렸어요, 왕성한 혈기만을 가지고 팀을 꾸려 대회에 출전했는데, 덜컥 우승까지 하게 됐지요. 30개 단체가 출전했는데 그 가운데는 직업선수로 구성된 35사단팀, 전주시청팀도 있었어요. 이들을 제치고 우승의 영광을 안은 우리들을 양혜경 원로교무가 총부로 데리고 갔지요."

대종사 성탑 앞에서 우승기와 우승컵을 들고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내민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사진 속 인물들을 한명씩 추억한다. 사진 속에는 하얀 런닝 앞에 '원불교'라는 세 글자를 또렷하게 새겨 입고 있는 청년들과 젊은 대산종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성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대산종사님은 우리 일행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셨어요. '큰일 했다'고 칭찬하시며 웃으시던 성안이 지금도 환히 떠올라요."

이후 김 교도는 직장 관계로 대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당시 대전교당에 주재하신 신제근 원로교무의 인도로 대산종사를 단독으로 알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일로 대산종사의 자비 훈풍에 젖어간 그는 줄곧 신도안을 찾게 되었다.

"하루는 회사에 복잡한 일이 생겨 혼자 고민하다가 스승님을 뵙고 해답을 구하리라 마음 먹고 신도안을 찾았어요. 마침 청년회원들이 법문을 받들고 있었는데 '준비하는 청년이 지녀야 할 심법'이란 제목이었어요. '침착에 바탕하여 자기를 이기자, 생각에 바탕해서 바른 길로 살자, 근면에 바탕해서 사은에 보은하자'는 내용이었지요."

그 말씀이 어느 때보다 김 교도의 심경을 울렸다. 마치 착잡한 그의 마음을 훤히 알고 해주신 법문 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일호의 사심도 없이 스승님의 훈증을 받들었고 또한 법문을 명함 크기로 인쇄해 만나는 인연마다 나눠줬어요."

부적처럼 몸에 지니며 다닌다는 그 법문을 지갑에서 꺼내 보인 김 교도는 대산종사의 법문을 또박또박 읽고 다시한 번 설명을 덧붙였다.

"첫째, 침착에 바탕해서 자기를 이기고 살자. 일시적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혈기로 날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생각에 바탕해서 바른 길로 나가자. 의롭지 못하고 법이 아닌 것으로 살면 불만이 쌓이고 불행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근면에 바탕해서 사은에 보답하자. 부지런히 자기 목적을 향해서 힘쓰는 사람이 되라는 법문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법문에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삼학이 모두 들어있다고 했다. 매 순간마다 이 말씀만 되새기면 꽉 막혔던 일들에 가닥이 잡히고 마음이 침착하게 가라앉으면서 순리대로 잘 풀렸다는 것이다.

"또 잊혀지지 않는 법문에는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적공이다'라 하셨던 말씀이에요. '모든 일에 적공을 드려야 한다. 조금 이루었다고 방심한다면 결국 퇴보할 것이며 그것은 적공이 아니다. 끊임없이 해 나가야 적공이다'라는 이 말씀은 너무 좋아요."

그에게 이 법문은 일과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심 없이 정성껏 공들여 일하는 원동력이다.
"그후 저는 작정하고 신도안을 드나들었어요. 다행히 대전에서 신도안이 가까워 찾아 뵙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요. 여름휴가가 되면 가족들과 함께 때로는 가까운 교도들과 함께 대산종사님 법문과 훈증을 받들기 위해 찾아 다녔어요. 14년을 계속했지요."

김 교도는 직장이 대전에서 서울로 이동하여 교당도 화곡교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화곡교당에서도 전광원 교도(현 화곡교당 교도회장), 나광원 교도, 김윤운 교도(홍대교수) 가족들과 함께 대산종사가 있는 신도안, 완도, 삼동원 등을 찾아 다녔다.

그가 내민 또 다른 사진에는 동심으로 돌아간 아이들 마냥 신도안 계곡에서 물놀이를 한창 즐기는 대산종사와 교도들의 격의없는 모습과 환한 표정들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재가출가 동지들과 좋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고 기적같은 일도 있었다.
"원기67년 란체스터판매전략연구소에서 일본으로 판매전략을 공부하러 갈 45명의 인원을 모집했는데 저도 그 가운데 한명으로 선발되었어요. 그런데 출발 4일전 대산종사님이 꿈속에 나타나 주의를 주셨는데 꿈의 내용이 아주 불길했어요. 불안한 생각으로 회사에 출근해 보니 일본으로 가는 것이 나 혼자만 취소되었다는 거예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같은 동료의 시비로 일본연수 기회가 무산된 것이었어요."

그런데 일본으로 출발한 44명의 일행들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투숙했던 호텔에 큰 화재가 발생해 연수생 전원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TV를 통해 지켜보며 뜬눈으로 밤을 보낸 그는 대산종사의 선몽에 말로 표현못할 은혜를 느꼈고 날이 밝자마자 신도안으로 달려가 야외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대산종사를 향해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스승님의 훈증으로 살아온 그가 어느 한 분야만을 강조하지 않았던 대산종사의 가르침에 보은하기 위해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서 늘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교단에서의 그의 활약은 헤아릴 수 없다.

원기67년부터 9년간 진행한 새생명돕기 국토순례행사를 비롯하여 중앙청운회장, 보은동산의 기수로서 범사회운동 전개, 서울종로원광신협 정상화, 법은사업회장, 해산국제육영사업회장, 원광대학교 산본병원 설립추진위원으로 공사에 참여하기까지 숱한 일들을 기꺼이 해냈다.

서울유스호스텔 개관에 있어서는 전문 경영마인드를 인정받아 서울시로 부터 수탁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또한 대공장사업을 이루기 위해 교도들과 함께 (주)영촌산업을 설립해 구미, 경산 등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1년 전에는 원창용역사업부로 (주)와이즈비젼을 설립하여 대기업 경륜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그곳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간과 쓸개가 다 녹고 썩어서 속이 텅빈다'고 말씀하셨던 대산종사님의 뜻이기에 저는 교단에서 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사양하지 않고 협조하여 왔습니다."

'변화와 혁신이라는 원기100년의 과제를 앞두고 대산종사의 가르침이 교단에 어떻게 이어지길 바라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허공을 이전 등기낸 수도자의 본분 그대로 마지막까지 왕궁묘지의 한 낡은 건물에서 기거하며 비닐하우스에서 온갖 손님을 맞이한 청빈의 삶을 살다가신 대산종사님이십니다. 각계각층의 세간락에 젖은 사람들에게 허세와 허욕,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난 텅빈 충만을 안겨준 교단의 큰 어른이셨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냉정한 반성과 점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합니다. 대산종사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언인가를 깨달아 진일보하는 성숙한 교단으로 탈바꿈했으면 합니다."

결국 대산종사의 경륜과 유훈도 초기 교단의 창립정신을 구현하여 재가출가 교도가 하나의 마음으로 교화대불공에 매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그의 마지막 말이 큰 울림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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