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범은 총부의 주무가 되거라"

성인과 가까운 곳에 사는 것도 복
대산종사에 대한 추억은 큰 행복

대산 김대거종사가 교단에 펼쳤던 경륜과 유훈들은 큰 산이 되어 후진들 가슴에 남아 든든한 지표가 되고 있다. 이에 본사에서는 6월 추원보본의 달을 맞이하여 재가 교도들의 대산종사 추모담을 통해 성현에 대한 추모의 정을 되새기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편집자주)

'…최대의 위축과 최대의 불행을 당했을 때 최대의 다행과 진전이 있을 것을 알아서 그것을 잘 활용하면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오후 6시. 전북교구 사무국에서 만난 백상범(73)교도는 수첩에서 꺼내 놓은 대산종사 법문을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그가 A4용지에 복사한 이 법문을 시간이 날 때 마다 읽고 또 읽어 용지가 헤질 정도다.

그만큼 대산종사의 법문이 유독 그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법문 뿐 아니라 원평, 구릿골, 완도소남훈련원, 벌곡 삼동원에서 받들었던 수 많은 법문들을 통해 가정사의 어려운 난관들을 극복하는 법과 인연 맺는 법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그런 만큼 대산종사에 대한 추억은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다. 그와 대산종사와의 인연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당한 4살박이 아들과 연결된다. 그의 나이 33세.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한 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교사생활과 가정생활에도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재를 지내고 나서 동전주 교당에서 교도 생활을 했다. 그의 사정을 알고 있던 심익순 교무가 신도안에 가자고 했으나 그는 애석하게 30초 사이로 기차를 놓쳤고 심 교무만 신도안에 가게 되었다. 그런 후 대산종사를 몇 번 먼 발치에서 뵙다가 원평에서 가깝게 뵙게 됐다. 그는 김대현 교무와 원평 조실을 방문하여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교무님이 저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을 아셔요' 하는 거예요. 그러자 대산종사님께서 '아, 그 애기' 라며 말씀하시는 거예요. 물론 초대 심익순 교무님이 제 아이에 대해 대산종사님께 말씀을 드렸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거든요.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그는 교당근처에서 동원 목욕탕을 운영하면서도 대산종사를 뵐 수 있다는 기쁨으로 살았다. 계속해서 놀라운 일을 경험하면서 교단과 대산종사에 대한 신성은 더욱 깊어만 갔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어른입니다. 어떻게 아시는지 깜짝 깜짝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부처님이 아니시고는 이렇게 잘 알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베풀어 주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은한다는 마음으로 생활 했어요."

그러나 시련은 있는 법. 교당 교도들로 부터 오해 아닌 오해를 받은 일도 있었다. 요즘 말로 왕따를 당했다. 너무도 억울해 항변조차 못했다. 배신감이 가득했지만 대응하지 않았다.

"교당에서 원평에 계시는 종법사님을 배알하러 가는 일정이 있었는데 합류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대산종사님 뵈올 마음에 따라 갔지요. 대중들 속에 앉아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대산종사님을 우러러 보니 저를 응시하고 계시는 것이예요. 깜짝 놀란 저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시고는 시선을 대중들 쪽으로 돌리셨어요. 말씀은 안하셨어도 제 마음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순간 그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바닥에 가라 앉았던 신심이 솟구쳤다. 세상을 온통 얻은 것 같은 기쁨이었다.

"대산종사님을 뵈온 후 제 신성과 공부가 부족한 것 만이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그 뒤로 누가 뭐라고 하든 더욱 교당 일에 충실했죠."

그는 대산종사의 법문을 듣기 위해 바쁜 중에도 원평에 자주 들렀다. 3대 최순철 교무도 '성인과 가까운 곳에 사는 것도 복이다'며 그의 동행을 기꺼이 반겼다. 대산종사는 그에게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한 법문을 내렸다. 그는 그 내용들을 자세히 기억했다. 짧은 문답이었지만 내용은 그에게 신심을 더욱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다.

"대산종사님께서 저에게 '야! 세계 인구가 몇이나 되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50억쯤 될겁니다'라고 대답했죠. 이어 '바다에 사는 생명이 몇이나 되냐, 하늘에 날아 다니는 것은 몇이나 되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했죠. 이어 종법사님께서 '땅 밑에 사는 생명의 숫자는 몇이냐 되냐'고 하신 후 땅을 가리키면서 '저기서 개미가 엄청 나오지'라는 말씀을 듣고 감지했어요. '50억 인구 중에 다행히 들어간 것만 해도 큰 복이다'라고 생각했죠. 불평불만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어요."

그가 가정경제가 파산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을 때에도 대산종사의 한마디는 큰 힘으로 작용했다. 그는 며칠을 머뭇거리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원평으로 향했다. 재가출가 교도들이 대산종사를 뵈러 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산종사는 그가 조실 문 앞에 서자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대산종사님께서 얼마 있지 않아 시봉진들에게 자동차를 대기하라고 하셨어요. 대산종사님과 금평저수지 근처에서 내렸죠. 둑을 거닐면서 저에게 당시 이야기를 해보라는 거예요. 다 들어주시고는 '업장 때문에 그런 것이니 괜찮다'라고 말씀하시며 손을 꼬옥 잡아 주셨어요. 그 말씀을 받드니 마음은 시원했고 희열이 충만했죠. 너무 은혜를 많이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쯤 있다 경제적인 일이 잘 풀렸어요. 또 한번 감탄했죠. 이것이 성인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루는 목욕탕이 쉬는 날, 원평 구릿골을 들렀다. 그날 따라 대산종사는 '내일 밥 싸가지고 와서 하루 놀다 가라'는 것이었다. 선뜻 아무 대답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기적으로 쉬는 날이 아니라 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음날 일이 생기고 말았다.

"오후에 볼 일이 있어 아들과 함께 전주고등학교 후문 옆을 나란히 지나가는데 갑자기 등짝이 뜨끔했어요. 주위를 살피니 각목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낯선 청년 하나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저희들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만일 머리를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아찔했습니다. 다시 덤벼드는 청년과 아들이 싸웠는데 나중에는 슬슬 도망치면서 이번에는 의자를 들고 나오는 것이예요. 누구의 신고인지는 모르지만 경찰이 와서 그 청년을 붙들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정신질환자였어요. 겨우 한숨 돌리고 나서 보니 아들도 등짝이 심하게 붓고 멍이 들어 있었어요. 대산종사님께서는 이 일이 일어 날줄 아셨나봐요."

그는 구릿골과 관련된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더 풀었다. 제비산이라는 지명만 들어도 반갑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대산종사는 그에게 인연 맺는 방법을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대산종사가 구릿골을 내왕하는 좁은 길목에 빈 지게를 지고 서 있던 촌부에 대해 말했던 것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촌부는 하루 종일 별로 하는 일 없이 있다가 대산종사님 차가 지나가면 반가워 했어요. 그럴때 마다 대산종사님은 차를 멈추게 하시고는 과자 등 약간의 선물을 건네주셨죠. 그러면 그는 좋아하며 받아가곤 했어요. 일행중 누군가가 '늘 주시니까 버릇이 됐어요. 빚지는 것 아닐까요?'하고 여쭈면 '빚이라도 져야 갚으러 온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부처님과 빚 인연이라도 맺는 것이 좋은가 보다라는 짐작을 했죠."

그는 대산종사가 벌곡을 방문한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인연복을 맺어주기 위해 빨리와서 사진을 찍으라고 독촉을 했던 기억들이 새롭게 다가온다고 했다. 한 번은 서울에 거주하는 교도 가족이 완도를 방문했을 때도 그의 가족들과도 사진을 찍게 했다.

"대산종사님께서 서울 교도에게 '이 애들이 전주에서 목욕탕 하니까 목간하고 가라'는 말씀에 모두들 웃었죠. 서울 분들이 어찌 동네 목욕탕까지 와서 목욕하고 가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선연을 맺게 해 주시고자 하는 부처님의 깊은 뜻이겠죠."

그는 대산종사 열반 한 달전 쯤 수계농원을 방문했을 때 시봉진의 만류로 사진을 찍어두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 했다. 영모원으로 출발하면서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 모습들을 지금도 아련히 기억했다.

"대산종사님께서 생전에 하신 '상범은 총부의 주무가 되거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어요. 육영사업회, 법은사업회, 원창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교전 법문사경에 이어 하루에 일원상서원문 100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꺼내 놓았던 법문 종이를 다시 수첩에 넣으며 '남은 여생이라도 교단에 보은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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