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두연마를 하게끔 무언의 자극을 주셨어요"

주말과 연휴, 휴가 때면 성안 뵙는 기쁨에 가슴 설레
은혜로운 법문 통해 공부길 잡고 적공 기회 삼아

대산 김대거종사가 교단에 펼쳤던 경륜과 유훈들은 큰 산이 되어 후진들 가슴에 남아 든든한 지표가 되고 있다. 이에 본사에서는 6월 추원보본의 달을 맞이하여 재가 교도들의 대산종사 추모담을 통해 성현에 대한 추모의 정을 되새기는 시간을 마련했다. (편집자주)

서면교당 이대선(54) 교도. 그는 인터뷰 내내 대산종사가 선물로 준 염주를 꼭 쥐고 있었다. 영산성지 삼밭재 마당바위 근처에서 자생하는 돌복숭아 씨로 만든 것이기는 하나 대산종사의 훈풍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의두가 잘 잡히지 않아 고심한 적이 있었어요. 기도식순에 따라 기도를 하면서 청정주의 '법신청정본무애' 글귀에 의심이 걸렸어요. 송주 시간에 계속 연마하니 점차 입정상태에 들어 가게 됐습니다. 정성껏 기도를 계속 하던 중 어느날 대산상사님을 뵙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신도안으로 향했지요."

원기67년, 대학원 1학년 때였다. 감상담 시간에 대산종사에게 그동안 연마해 온 의두에 대한 작은 깨우침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이 날을 1월14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대산종사는 그에게 '더 연마하라'며 돌복숭아씨 염주를 품에서 꺼내 준 것이다.

그는 1월17일 아침, 동학사 주차장 인근 양지 바른 풀밭에서 진행된 야외법회와 관련해 대산종사의 추모담을 털어 놓았다. 그는 튼튼하고 푹신하며 방수성이 좋은 배낭을 펼쳐 대산종사께 편히 앉으시도록 했다. 1월이라 땅에 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의 감상담이 있은 뒤 사회자가 그에게 노래를 한 곡 하라는 주문을 했다.

그는 평소 애창하던 '토굴가'를 불렀다. 그가 토굴가를 처음 접한 것은 항타원 이경순 종사 문집을 통해서다. 그 책에는 범어사 계곡에서 토굴가를 즐겨 불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그는 토굴가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인연이 있던 운문사 스님으로부터 테이프를 구한 후 그 가락에 따라 즐겨 불렀던 것이다.

"토굴가를 부르고 앉으니 대산종사님은 얼굴을 돌리시고는 저를 보셨어요. 대산종사님은 마스크를 벗으시며 '대선이, 너 그 노래 즐겨 부르면 네 뜻을 이룬다'고 하셨어요. 저에게는 이런 엄청난 행운의 추억이 있습니다."

신도안에 돌아온 그는 대산종사와 함께 신도안 들녘을 산책하는 기쁨을 누렸다. 2주일간의 신도안 생활은 그에게 있어서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루는 대산종사님께서 산책하던 중 '대선이 너 3학 3.4 아냐'고 하셨어요, 갑자기 말씀하시니 알아차리지 못했죠. 옆에 다른 시자분이 '3학공부 3.4'라고 귀띔을 해요 그때 3학공부1.2.3.4가 나와 있었거든요. '3학 공부를 편수하지 말고 3학 공부를 오롯이 더 깊이 연마하라'는 말씀으로 받들었어요. 3학 1.2.3.4는 대산상사님의 방대한 독서량과 연마의 정수를 느낄수 있어요. 이런 은혜로운 법문들은 공부길을 잡고 적공 하는데 대단한 도움을 주었어요."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바쁜 하루 하루를 보냈지만 적공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방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액자를 붙여 놓기도 하고 때론 '공즉도생(空卽道生) 공즉덕생(公卽德生)'의 글귀를 연마하기도 했다. 주말과 연휴, 휴가 때면 대산종사를 뵙는 기쁨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신도안에서 행한 대산종사의 한 법문이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일이 있었다. 원불교학과 신입생들이 출가동기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몇몇 신입생들의 출가 서원을 들은 대산종사는 학생들에게 '부처님 눈을 본 사람이 있느냐?'라며 법문을 했다. 이 법문이 그가 대산종사를 여래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산종사님은 신입생들의 이런 저런 답변을 들으신 후 ' 너희들에게는 너희 부모님의 눈이 곧 부처님의 눈이다. 부모님은 자식을 온갖 자비를 다하여 키워 주시므로 부모님이 너희들에게는 바로 부처님이시다'고 하셨어요. 법당 뒤쪽에 앉아 이 법문을 받들며 '부처의 표준을 이처럼 쉽게 밝혀주시고 공부길을 잡아 주시는 것에 대해 큰 감동과 희열을 느꼈습니다. 여래가 아니고는 이렇게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온몸에 전율이 일어 난 적이 있어요."

그는 이 법문을 공부 표준으로 삼고자 마음먹었고, 이 법문을 수시로 반조했다. 법문을 반조하면 할수록 대산종사가 여래라는 사실이 더 절실히 느껴져 왔다.

그는 신도안에서 대산종사의 밝은 미소를 본적이 있다고 술회했다. 원불교학과 학생들과 함께 동석한 자리였다. 그는 대산종사 앉은 의자 바로 밑에서 법문을 받드는 기회를 가졌다.

"'사람의 일생에 대말 행사를 두 번 참석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고 말씀하신 후 '3대말되면 애들 나이가 몇 살되지'라고 물어 보셔요. 그러면 시자가 '70살쯤 됩니다'라고 말하니 대산종사께서는 '70살이면 한참 일할 때네'라고 말씀하셔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70이면 쉴 나인데 한창 일할 때라고 하시니 70살 되어도 열심히 교화사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곧 이어 혼잣말로 하시는 내용을 들었지요. 미소를 지으시며 '애들이 3대말 행사에 어떻게 하는지 모습이 보인다'는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3대말 행사를 잠깐 보신 것 같아요. 돌아오는 3대말 행사도 잘 진행될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공부에 한참 재미를 붙여 갈 즈음 꿈 속에서 대산종사를 현몽했다. 그는 이 시기를 머리가 맑았을 때라고 표현했다. 계속 하다보니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문구가 떠올랐다.

"꿈 속에서 대산종사님께 '기도 끝난 중간 중간 어떻게 공부합니까'여쭈니 '참회하는 공부를 해야 된다'고 말씀 하셨어요. 기원문 결어에도 대참회, 대사면, 대해원, 대정진, 대보은, 대진급이 나와 있습니다. 크게 진급하는 길은 스스로 항상 부족함을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하고 대참회로부터 모든 공부가 시작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요즘은 참회문 공부를 더 하고 있습니다."

원기70년 7월 그는 대산종사와 함께 완도 정도리 바닷가로 소창을 나갔다. 대산종사가 수영을 하면 그는 곁에서 함께 수영을 했다. 수영을 마친 뒤에는 자갈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산종사의 몸 구석구석을 따뜻하게 데워진 자갈로 마사지를 했다.

어느 때 대산종사는 그의 손을 잡고 정도리 바닷가에서 20분 이상 산책하기도 했다. 대산종사는 바닷가의 자갈 중에서 일원상이 희게 새겨진 조약돌을 직접 주워 그에게 주기도 했다.

"대산종사님은 의두연마를 하게끔 무언의 자극을 많이 주셨어요. 곁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받든 소소한 법문들은 있지만 거의다 대중들과 함께 받들면서 공부길을 잡아 나갔습니다. 신도안뿐 아니라 원평, 구릿골, 왕궁에서도 저에게 큰 은혜를 주신 여래이십니다."

원기80년 광안대교 감리단 구조 분야 책임자로 부산에 내려 와 정착한지 1년 후인 원기81년 7월24일 그의 가족들은 하와이 국제훈련원에서 대산종사를 뵈었다.

그는 아들 정도와 딸인 정심이가 대산종사를 안마해 드렸던 은혜가 새롭다고 말한다. 식사 후 승용차로 주변을 드라이브할 때 옆자리에 타고 함께 다녔던 추억도 간직하고 있다.

"제 아내가 하와이에서 정전 마음공부에 대해 큰 자극을 받고 지금까지 마음공부 지도를 해 오고 있습니다. 이것도 대산종사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인터뷰가 무르익을 때 쯤 대산종사의 법문중 하나를 소개했다. 견성은 100점, 성불은 1,000점, 제중은 10,000점이라는 법문이었다. 익히 알았던 법문이라 새로웠다. 그는 이 법문을 완전 가슴 때리는 법문이라 칭했다.

"견성하면 끝인줄 알았는데 성불에 이어 제중은 만점이라는 법문에 솔직히 놀랐어요. 양주에서 원평에서 채약을 하시면서 수많은 적공을 하셨기에 그런 법문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가출가 교도들도 원기100년을 앞두고 대적공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염주를 다시 한번 쳐다 보았다. 대산종사를 가까이 모시고 받든 행복했던 추억들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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