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이자 여름날의 우리문화

다양한 완초공예, 예술품으로 승화
강화 화문석의 유래 및 역사
한 장의 화문석은 예술 그 자체

 

▲ 호랑이 화문석, 김선희 作, 2008년 왕골 공예품 최우수상.

 

'모내기'라 하면 사람들은 벼농사를 연상한다. 하지만 강화도 양오리 마을 사람들은 다르다. 이곳 사람들은 두 종류의 모내기를 한다. 하나는 곡식을 위한 모내기이고, 또 하나는 왕골을 재배하기 위한 모내기이다. 같은 시기에 모내기를 하지만 수확 시기는 왕골이 벼보다 2개월 빠르다.

옛 말에 쌀 한 톨을 얻기까지 무려 여든 여덟 번 농부의 손길이 간다고 한다. 하지만 왕골은 무려 60만 번의 손길이 간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하며 왕골을 재배하는 이유는 바로 화문석, 일명 꽃돗자리를 만들기 위함이다.

강화도 화문석체험마을에서 40년 동안 화문석을 짜 온 안금자(57)씨를 만났다.
"나야 이웃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이 마을로 시집을 왔어. 17살부터 화문석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허리도 아프고 일손도 없어서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구만."

화문석을 짜며 두 아들을 교육시키고 지금껏 가정을 꾸려온 그의 집 앞에는 왕골을 재배하는 논이 있다. 한 여름 큰 키를 자랑하며 바람에 이리 저리 나부낀다. 그런데 여느 논과는 풍경이 다르다.

"왜 논 둘레에 말뚝을 박아 큰 그물을 쳐 놓았어요?"

"왕골이 키가 크잖여. 비바람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못 쓰게 되니껜, 쓰러지지 말라고 그렇게 했지. 저 나이롱 줄 사이로 왕골들이 다 자라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어."

"그럼 왕골을 수확 할 땐 저 끈들을 어떻게 해요."

"일일이 손으로 다시 거둬야제. 한 여름에 그거 할라믄 아주 힘들제. 어디 그것 뿐여. 이 왕골들은 중복쯤엔 다 거둬야 해. 안 그러면 깨끗한 왕골을 얻기가 어렵제. 시기를 조금만 늦추면 왕골 색깔이 자주색으로 변해 버려서 못 써."

▲ 화문석체험마을 앞 논에는 왕골이 뜨거운 햇살 아래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얼마나 이골이 났는지 수확할 시기를 연상하는 안 씨의 이마엔 벌써 내 천자를 그리며 일그러 진다.

화문석을 만들 깨끗하고 윤기 흐르는 왕골을 얻기 위해서는 이른 아침에 베어야 한다. 또 수확한 날 바로 세 쪽으로 나누어서 그늘에 말려야 한다. 그나마 요즘은 건풍기를 갖춰 건조에는 좀 쉽다고 한다. 하지만 한 여름에 왕골을 수확하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요즘 양오리 마을에도 왕골을 재배하는 가구가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요즘 안금자 씨는 용 문양 12자 화문석을 3인 1조가 되어 짜고 있는 중이다. 특별 주문에 의해 짜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상가에 내다 팔기 위함이다. 일주일 정도를 짜야 상가에 내다 팔 수 있는 화문석이 완성된다.
그가 화문석을 내다 팔며 잊을 수 없던 일을 하나 소개한다.

"손님에게 주문이 들어와 화문석을 열심히 짰거든. 기계가 아닌 이상 끝과 끝이 딱 들어 맞는 일이 쉽지는 않아. 촘촘하게 짠다고 하지만 사람마다 손이 다르니 끝이 약간 맞지 않았어. 그래도 혹시나 하여 손님에게 보여 드렸더니 끝이 맞아야 한다고 다시 풀어서 수선해 줬어. 그만큼 힘들어."

손끝이 야물어야 실수가 없는데 간혹 실수를 하게 되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고.
요즘은 그나마 화문석 사방을 천으로 감싸기 때문에 그나마 끝을 맞추는 일이 수월해 졌단다.

화문석은 왕골의 특징처럼 질기고 윤기가 강하며 통풍효과가 탁월하다. 그래서 여름철 땀 흡수는 물론 피부를 보송보송하게 해 주며 겨울에도 외부 냉기 방지에 더 없이 좋아 인기를 끌고 있다.

예로부터 강화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특히 전국 유일의 왕골 공예품인 강화 화문석은 고려시대부터 전수된 자랑스런 민족문화유산이다.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에 위치한 '화문석 문화관'. 그곳에는 왕골 공예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다양한 왕골 공예품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자료에 의하면 화문석의 유래는 문헌에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강화는 39년 동안 고려의 수도 역할을 하면서 강화로 이주한 왕실과 관료를 위해 최상품의 자리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조선 왕실로부터 화문석의 도안을 특색있게 제작하라는 하명을 받고 백색 자리 생산지인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한충교 선생의 연구 결과 도안에 의한 화문석 제작에 성공하였으며 그의 다양한 도안과 제작 기술은 현재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강화 군청에서는 매년 왕골 공예품 경진대회 및 디자인 공모전 등 다양한 왕골 공예문화 사업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현대적인 디자인 도안 등을 제공하고 있다.
▲ 안금자 씨가 화문석을 짜고 있다.

왕골은 한자로 완초(莞草)라고 부른다. 줄기와 잎, 속에 따라 그 쓰임새가 구분된다.
줄기는 화문석, 화방석, 삼합의 공예품 재료로 쓰이고 잎은 신발, 바구니 그리고 속은 비교적 질겨서 누엣자리나 깔개로 쓰이는 그야말로 어느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으뜸 생활용품의 재료가 되어 왔다.

요즘은 왕골을 이용한 완초 소품들이 등장했다. 노리개, 핸드백, 넥타이 핀, 목걸이, 브롯지, 장식품, 보석함 등 다양하다.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하여 각종 경진대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며 완초공예작품의 우수성과 실용성을 국내외에 알려오고 있다.

지난해 왕골 공예품 전시회에서 김영순 강화완초전통보존회 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김포, 강화에 중소기업들이 늘어 농가의 부업이 공장으로 이전되고 공예인들의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현재는 몇 백 가구들만이 완초 공예를 부업으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며 "머지않아 그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매우 걱정스럽다."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엮어내는 우리 조상의 멋과 슬기로움이 가득 담겨져 있는 화문석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저가제품 수입으로 왕골 공예품이 생산량 감소와 더불어 가격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강화군에서는 차별화된 예술품으로 완초 공예품을 명품화시켜 가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제 현대인들에게 화문석은 단순한 돗자리가 아닌 '삶의 여유'이며 '여름날의 문화'가 아닐까 싶다. 한옥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문석이라지만, 여름엔 넓은 거실에 쇼파를 한쪽으로 밀어 두고 화문석을 깔아 보자. 시원하고 한가로운 일상의 여유가 생활의 가치를 더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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