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는 옹기가 딱이다"

 

▲ 확독
'웰빙'이라는 열풍이 불면서 어느날 '옹기'라는 그릇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참 일어나던 시절, 우리 것은 무조건 불편하고 나쁘다고 인식되었던 시절, 옹기는 그 대표적인 '구식' 물건이었다. 양은 장수와 플라스틱 그릇장수들은 밤늦은 시간 마을에 몰래 들어가 돌을 던져 옹기 항아리를 깨고는 다음날 다시 그 마을에 들어가 그릇을 팔았다. 당장 담아둘 그릇이 필요하기에 사람들은 옹기 대신 양은과 플라스틱 그릇을 사게 되었다. 실제로 사용해보니 옹기보다 가볍고 깨지지도 않아서 좋았다. 그렇게 점점 우리 생활에서 옹기는 하나 둘 씩 그 모습을 감추어가고 있었다.

발효식품 최고 저장고

옹기의 가장 좋은 특징은 '숨을 쉰다'는데 있다. 옹기를 만드는 흙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구하기 쉬운 2차 점토인데, 사람들은 흔히 황토 혹은 진흙이라고 부른다.

옹기토는 도자기 흙보다는 훨씬 더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흙은 옹기가 숨을 쉬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옹기 흙은 비교적 입자가 굵은 편이어서 그릇의 벽에 아주 미세한 구멍을 만들어준다. 이 구멍을 통해 가장 입자가 작은 공기만이 소통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옹기를 '숨 쉬는 항아리'라고 부른다.

숨쉬는 그릇인 옹기는 우리 삶 특히 식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부터 우리 민족의 음식에 기본은 장류(醬類)가 주를 이루었다. 최첨단 시대를 사는 현재에도 우리들의 입맛은 김치와 고추장이 편안하고, 설사 소싯적 입맛이 피자와 스파게티에 푹 빠져있었다 해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찾게 되는 것이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선조들의 그림이나 글을 보면 고추장·된장·간장·김치·젓갈 등의 발효식품을 백자나 청자와 같은 도자기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맛있고 귀한 된장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옹기 항아리에 보관한다. 이는 발효식품이 제대로 '발효'를 하기 위해서는 숨을 쉬는 옹기 항아리에 넣어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백자나 청자와 같은 도자기는 물론 옹기보다 값비싼 그릇이었으므로 된장을 보관하기 아까웠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자기 흙은 입자가 너무 곱기 때문에 옹기처럼 숨쉬는 구멍을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자기 안에 저장하는 발효식품은 '발효'가 아니라 '부패'가 된다. 따라서 조선시대 높은 사대부 집안이나 임금님이 계셨던 궁궐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반드시 어느 한 쪽에는 항아리가 잘 정돈된 장독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높으신 양반들이라고 해서 모두 도자기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네들도 중요한 간장·된장·고추장을 먹어야했고, 김치나 젓갈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옹기 항아리를 사용했다.

선조들 삶의 모습 담겨있어

옹기는 '생활 그릇'이다. 우리 선조들은 그 어떤 그릇보다 옹기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사용했다. 도자기가 장식적 요소가 강했다면 옹기는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했다 하더라도 생활 그릇이었다. 그래서 옹기의 안에는 선조들의 삶의 모습이 하나하나 담겨있다. 옹기가 생활전반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던 것처럼 그 안에 담겨진 사연도 매우 다양하다.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항아리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과거 남정네들은 재혼을 하거나 첩을 두고 살아도 흠이 되지 않던 시절, 남편을 잃은 과부들은 유교적 사회통념상 짝 잃은 외기러기마냥 외롭게 살아야했기 때문에 동네에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딱한 사정의 과부가 적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은 혼자 살면 외로운 법. 엄격한 사회 통념 속에서도 이웃 마을의 참한 외톨이 과부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이고 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채 장사나, 옹기 장사를 하는 여인들의 귀띔으로 과부를 소개를 받으면, 이웃 마을 홀아비가 과부댁으로 가서 쌀 항아리 속에 여인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그 독을 지게에 짊어지고 나왔다. 아무리 몰래한다고 해도 다들 속내를 알기 마련이라 이웃 사람을 만나면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는 도중 넘어져 독이 깨지기라도 하면 인연이 서로 맞지 않음을 한탄하고 없었던 일로 넘기곤 했다고 한다.

된장이나 간장, 김치가 담긴 줄 알았던 항아리에 참한 과부댁이 있었다는 상상만 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 젓갈독(마포).
다양한 옹기, 생활속의 보배

옹기가 주로 주부들이 사용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어머니·할머니들의 사연도 많이 담겨있다. 그 중 '확독'이라는 옹기가 있다. 자배기처럼 생긴 그릇 안에 요철(凹凸)이 새겨져있는데, '폿돌'이라는 돌멩이처럼 생긴 것과 짝을 이룬다. 확독은 보리를 갈거나, 열무김치를 담글 때 고추와 찹쌀 풀을 넣고 갈아서 양념으로 만들 때 주로 사용하였다. 지금이야 믹서기에 넣고 단추만 누르면 금세 갈리지만, 확독을 이용해 갈려면 많은 힘과 시간이 들어가야 했다. 보리쌀을 확독에 씻기가 어찌나 힘이 들었으면 충남 서산지방에서는 '오른쪽으로 시번(세번) 시엄씨 밉고, 외약목(왼쪽)으로 두 번 시누이 밉고, 보래(보리) 씻기 징그럽다'라는 민요도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요즘 세대들은 그 심정을 모르지만, 이 확독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오른쪽 팔에 힘이 빠지는 듯하다.

한편 사용자가 아닌 제작자의 사연을 담고 있는 옹기들도 있다.

젓갈독은 새우·멸치·조기·굴 등의 어패류에 소금을 넣어 발효시킬 때 사용되던 그릇으로, 대부분 길쭉한 원통형이다. 옹기민속박물관에 소장된 한 젓갈독에는 '마포(馬布)'라는 지역명이 한자로 크게 쓰여 있는데, 본래 마포는 '마포(麻浦)'라는 한자로 표기된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옹기'만 만들다보니 글을 익힐 시간도 여력도 없던 장인들이 이처럼 한자를 적을 때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던 것이다.

옛날 서울 마포는 젓갈이 많이 생산되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많은 젓갈을 젓갈독에 담아 한강 수로를 이용해 운반되었던 모습을 잘 알려주는 유물이었다. 동시에 장인들의 순박하고도 진지한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소중한 이야기 주머니인 것 같다.

웰빙시대에 옹기는 건강 그릇

삶의 곳곳에서 다양한 사연을 담고 있는 옹기는 그 사연의 주인공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함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웰빙시대에 옹기는 건강 그릇으로 다시 각광받고 있지만 예전만큼 명성을 휘날리며 그릇계를 군림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치냉장고가 아무리 비싸고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한 겨울 땅 속에 묻어둔 김치항아리에서 꺼내온 김치 한 쪽의 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맛이 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아무리 플라스틱이 가볍고 스테인레스가 깨지지 않는 그릇이어도 발효식품의 '깊은 맛'을 내는 데는 역부족이다.

뼈 속 깊숙이 김치 맛과 된장 맛을 간직하고 있는 한국인.
별 볼일 없어 보여도 한국인에게는 옹기가 딱이다.
▲ 민경은/ 옹기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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