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여한과 원불교적 가치의 실현

대종사를 비롯 9인 선진의 모습, 우리에게 다가선 부처와 보살의 화현
천지가 감응한 연대, 혼돈으로 가득찬 세계 구원하는 희망

▲ 영산성지 법인광장에 있는 조형물. 구인선진의 사무여한 정신과 법인성사를 상징하고 있다.

본사는 8월 법인절을 맞아 법인성사의 본질을 살펴보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해 종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정신을 조명해 보고자 4주에 걸쳐 특집을 기획했다.

■ 글싣는 순서
▷ 1부 : 사무여한과 법인성사
▶ 2부 : 원불교적 죽음
▷ 3부 : 법인정신의 부활
▷ 4부 : 오진탁 교수의 죽음학

사무여한은 원불교 창립의 원동력이자 정체성에 다름 아니다. 사무여한의 정신이 없었던들 원불교는 일회성에 그친 불교개혁 운동 단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열망을 한 몸에 안고 세상에 웅혼의 기상을 드러낸 일대 초역사적 사건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무엇이 이처럼 일상의 한 가운데에서 대우주적 사건을 만들어냈는가는 소태산대종사의 깨달음에 그 열쇠가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부처의 그것에 비추어 연원 지은 진솔한 고백에 있다.

여기에 불불계세 성성상전(佛佛繼世 聖聖相傳)의 인류사의 진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구성원은 이로 인해 인류의 고난과 고통을 더불어 안고 해결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바로 각자가 시대불(時代佛)의 사명을 가지고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그 사명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대종사를 비롯 9인 선진의 모습은 바로 우리에게 다가선 부처와 보살의 화현이자 불법의 궁극적인 정신을 몸소 구현해낸 시대불인 것이다.

2천5백여 년 전 역사 속의 부처는 이미 이를 우리에게 직시하도록 하였다. 부처가 되기 위해 500생의 삶을 자비희생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하는 것이다. 남겨진 500여 편의 본생담이 바로 그것이다.

때로는 무소불위의 군주에게 바른 정치의 길을 가르쳤으며, 때로는 사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내기도 하고, 인간과 동물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몸을 배고프고 굶주린 동포에게 아낌없이 공양하기도 하였다. 불법이 자비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이러한 부처의 아낌없는 자기희생의 결단에 연유한 것이다. 후대인들에게는 부처의 깨달음의 동인으로 이러한 희생의 과거가 회자되었지만, 대종사는 대각 후, 이를 현실로 재현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중생을 구원할 길을 펼쳐 놓으신 것이다.

대승의 보살정신을 바로 여기에서 실천하자고 하신 것이다. 그대들의 몸은 곧 시방세계에 바친 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다.

사무여한은 이미 대중에게 보시된 불보살의 몸이 중생의 몸과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 길은 대자대비의 길을 말한다.

20세기 수천, 수억 명에 이르는 무의미한 살육의 길 위에서 피어난 이 시대의 대자대비는 수동적인 길이 아닌 능동적인 길을 말한다. 대자(大慈)는 곧 이 땅 위에 옳음과 정직과 순수가 이루어낸 가치가 꽃피운 결과를 함께 누리며 기뻐하는 것이다. 대비(大悲)는 전도된 가치를 바로 세워 인간의 육신과 정신에 깃든 부조리를 걷어 버리고, 약자와 강자가 함께 대자연의 은혜를 함께 누리도록 하는 일이다.

지구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인간은 대지의 신인 가이아의 품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특별한 능력이 있든 없든 누구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는 결국 평등함을 깨닫게 된다. 하루하루를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중생에게 이러한 자유와 평등의 제 권리를 회복하도록 함이 곧 대자대비의 발로인 것이다. 천부인권이 현실정토 위에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원불교적 가치는 이러한 사무여한의 정신을 대전제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 가치는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지은과 보은, 해원과 상생, 중도와 공화 등 우리에게 익숙한 것만으로도 일반대중에겐 충분할 것이다.

이 사회와 세계는 누군가 나서 주기를 바라듯 애타게 그 역할의 주인공을 찾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상극의 업연과 무명의 업장을 해소하는 일이야말로 원불교의 강렬한 메시지이며, 혼돈으로 가득찬 세계를 구원하는 희망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일은 원불교 탄생 이후 약 1세기에 걸쳐 소리없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물신을 앞세운 소유의 환상 제어할 때

첫째, 돈에 대한 중병에 걸린 증세를 치료하는 일이다. 직선적 발전의 욕망에 제동을 걸어야 할 브레이크가 고장난 지금 무한생산과 무한소비만이 잘 사는 길이라는 헛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물신을 앞세운 신자유주의 전횡이 극에 달한 지금 돈은 소유를 달성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화폐는 끊임없이 남발되고 있다. 적절한 상태의 사회적 부의 분배를 통해 점진적으로 소유의 환상을 제어해야 한다.

교의품 말씀처럼 돈병에 의해 의리나 염치가 없어지고, 윤기와 정의가 상하는 현실은,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 기쁨이 있다는 고전적인 지혜와 전통의 방식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있다.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노력과 이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관철시키고자 하는 끈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대화와 화해, 이를 통한 중용과 상생의 가치 필요

둘째, 공멸로 가는 사회의 적대적 관계를 말끔히 해소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대화와 화해, 이를 통한 중용과 상생의 가치가 점점 사라져가는 한국사회는 물론 세계 도처의 현실 위엔 상대에 대한 증오심만이 끓어오르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전쟁은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의 존재의 근거가 상대에게 있음을 잊어버린다.

공생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승자독식이 아니라 서로 밀어 주고 서로 이끌며 함께 파란고해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상대를 통해 내안의 적인 삼독심을 정견(正見)하는 것을 은혜로 아는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사회인 것이다.

죽음의 문화, 진지한 고민과 논의 필요

셋째, 더욱 시급한 것은 사회적 타살인 자살은 물론 지구 각지의 전쟁으로 인한 대량타살이 만연하는 죽음의 문화를 제거하는 데에 있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말살하는 일이 바로 자살이다. 마음의 극한적 어둠 속에서 우리가 돌보지 못한 이웃이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는 시비이해의 대립으로 인한 대량타살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미물곤충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데, 하물며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자연적인 죽음 외에는 자신과 타인 누구도 하늘의 선물인 목숨을 뺏을 권리가 없음을 보다 진지하게 이야기 하고, 이를 막기 위한 범지구적 규모의 논의를 일으켜야 한다.

구인선진은 연대의 표본

넷째, 연대하는 힘에 대한 신뢰이다. 구인선진은 연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홉 분이 보여준 연대는 사방팔방에서 함께 하는 힘을 모으는 일이다. 인류를 평화로 이끄는 힘은 모두가 하나 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를 결집할 능력을 천지가 감응한 백지혈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인류가 사는 곳곳에서 우리가 꾸는 꿈을 함께 꾸고 실천에 옮기며 연대의 손을 잡기를 기다리는 곳은 너무나 많다.

더욱이 민족, 국가, 종교, 시민사회단체, 국제 NGO 등 이들의 바른 이상을 하나로 묶어내며 진정한 동반자로서 연대할 때, 그 힘은 배가될 것이다.

말하자면 역대 교단의 지도자들이 줄곧 제시한 정교동심, 종교연합, 공동시장개척 등은 연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원불교적 가치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자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인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곳에서 나온다. 이를 체현한 소태산대종사가 앞장서 구인 선진들과 함께 지상에 구현한 것이 바로 법인성사인 것이다.

이러한 가치는 분별과 주착으로 인해 생긴 인간의 편견과 아집을 놓은 곳에서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경계의 벽을 허물고 나와 너의 일치, 나와 세계와의 하나 됨을 지향할 때 그 문은 빗장을 열어줄 것이다.

▲ 원익선 교무
    동국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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