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 이름 지어 영산이라네!

▲ 영산선원 전경. 왼쪽 함석지붕이 대각전. 대각전 뒤편으로 촛대봉 자락이 보이고 오른쪽 뒷편으로 선진포 건너 입암마을 초가지붕이 보인다. (원기40년대 후반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

영산(靈山)
원불교 근원성지인 '영산'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성지순례를 오는 교도와 일반 순례객들이 영산을 방문하면 꼭 물어 보는 질문 중의 하나다.

영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영산이라는 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머물던 영취산(靈鷲山)을 말하며, 기사굴산의 번역인데,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부근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던 장소의 이름이다. 영취산에는 신선들이 살았고 또 독수리가 많이 있음으로 영취산 또는 추두(鷲頭), 추봉(鷲峰), 추대(鷲臺)라 불렀다고 한다.

근원성지를 영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종경 〉서품 2장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고 모든 종교의 경전을 두루 열람하다가 금강경을 본후 석가모니 부처님을 연원으로 삼고,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고자 하는 뜻이 천명되어 있다.

▲ 1원기60년대 영산원.
또한 월보 41호(원기17년 10월)에 수록된 주산 송도성 종사가 작사한 '영산가'라는 제목의 가사에서도 영산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대성 종사 즉 소태산 대종사가 영산이라 이름지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아름답다 이 강산 좋은 경계여,
우리 도덕 기초지로 점지하셨네.
천만고에 주인 만난 절승 강산을
대성 종사 이름 지어 영산이라네.

구수산에 토한 공기 쇄락 하옵고
촛대봉에 돋는 달 어여쁘도다.
은선옥녀 기절(奇絶)한대 해조(海潮) 들고나
선경 일대 그림이 완연하여요.

이 도덕과 이 강산을 누가 찾느냐
선각하온 우리가 주인이오니
동지들아 동지들아 일심합력 해
우리 도덕 이 강산을 널리 포양하세.

▲ 2정산종사의 가족이 성주에서 이사하여 생활하던 사가. 원기40년대 촬영
원불교 근원성지
이처럼 영산성지는 원불교 성지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의 탄생과 구도를 비롯 일원의 진리를 대각한 곳이다. 또한 구인선진들과 함께 초기 교단의 반석을 다진 교화 현장이자,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만들었던 영성공동체로서의 첫 출발한 역사적 현장이다.

길용리가 위치한 백수(白岫)라는 지명은 100(百)에서 1(一)을 떼어버린 아흔아홉의 묏부리를 뜻한다고 한다.
지명이 말해주듯이 백수는 구수산 줄기의 많은 산봉우리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해안 산간 지역으로서, 바닷물이 깊숙이 내륙까지 들어오던 시절에는 구수산 삼면이 물에 잠겨 섬 모양을 이루었다고 영광군 군지에서는 밝히고 있다. 특히 길용리에 위치한 구호동(九虎洞)은 아홉 호랑이가 노루목의 노루를 노려보고 달려드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범현동(帆懸洞)은 돛대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영산성지에 대하여 대산종사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영산 대성지는 주세성자이신 대종사님께서 색신여래로 탄생하신 대성지이요, 주세성자이신 대종사님께서 법신여래를 탄생시키신 대각성지이며, 구인선진께서 사무여한의 대 혈성을 올려 법계로부터 천 여래 만 보살을 배출시키고 억조 창생의 혜복의 문로를 열어줄 소명(召命)을 부여받은 회상의 발상지이요. 방언의 대 역사로 영육쌍전, 동정일여, 이사병행 하는 일원회상의 시범을 보여 주신 곳이며, 선학원생(禪學院生)들을 전미개오 시키고 연도수덕(硏道修德)케 하는 광불도량(廣佛道場)으로 도맥(道脈)의 원천지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와 일체 동포는 참배(參拜)하고 봉고하여야 할 대성지이다."

▲ 3영산선원 전경. 초가지붕 이엉을 교체하고 있다. 원기 40년대 촬영.
영산 관련 기록물 고증과 보존이 중요
영산과 관련된 기록물을 찾아보면 교단 초기 간행물인 월말통신 12호(원기14년)에서 응산 이완철 선진이 영산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월말통신 16호에서는 시창(원기) 7년에 영산정사의 건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음력 6월27일에 평상 예회에 하기 기념(夏期記念)이라는 행사를 근동 회원들이 영산정사에 모여 정산종사의 사회로 법회를 보았다고 되어 있다.

연도에 관한 기록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는 모르지만 대개 원기8년에 대종사 모친 열반 이후에 구간도실을 현재 영산원으로 이전하였다고 교사에서 배웠다. 월말통신에서 지칭하는 영산정사가 현재 영산원 건물을 뜻하는 것인지 고증의 필요성은 충분할 것이다.

만약 영산정사가 현 영산원 건물이라면 월말통신의 기록적 가치로 보았을 때 시창 7년에 현재의 영산과 관련된 건물의 건축들이 이루어진 시기가 더 빠른 시기로 추정된다. 원기15년 이전의 기록물에서는 영산정사 영산관이라는 명칭이, 월말통신 34호에서 영산원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영산성지와 관련된 초기 사진 자료를 찾아보면 대종사 재세 당시의 사진은 찾을 길이 없고, 정산종사와 주산종사께서 영산학원장을 지낼 무렵에 촬영된 사진을 찾을 수가 있다. 매우 간난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선원 해제식에 사진 촬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원기28년(1943) 대종사 열반 이후 묵산 박창기 선진에 의해 촬영된 사진을 통해서 영산성지와 관련된 많은 사진들이 등장을 하고, 원기56년 반백년 기념사업 이전의 사진들을 통해 영산학원생과 교무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초가지붕에 이엉을 엮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교단 초창기 '대종사가 꿈꾸었던 회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생각해 보면, 대종사와 구인제자들이 했던 주경야독의 삶이 영육쌍전이자, 동정일여이며 이사병행을 통해 일원회상의 모습을 이곳 영산에서 몸소 보인 것이라 생각된다.

천지간에 가장 아늑한 성지, 이곳에는 오늘도 영성공동체의 삶들이 펼쳐지고 있다.
<영산사무소>
▲ 구수산 연봉이 감싸고 흐르는 영산성지, 가까이 높아 보이는 산이 옥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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