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과 익살이 깃든 마을 수호신

장승은 마을 신앙의 대상물로 정신적 지주
마을의 재액방어와 이정표, 경계표 역할

우리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어느 민족 어느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습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외래종교가 들어왔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배척되거나 마찰을 크게 빚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존의 우리 토착신앙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이 땅에 어울리는 새로운 신흥종교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를 종교박물관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신들림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고도 한다. 특히 수 천년동안 우리 토양에서 자연 발생하여 조상대대로 신앙되어 온 민간신앙은 이러한 우리의 종교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신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준다고 믿어지는 여러 잡신들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관념은 무조건 무섭다거나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적당히 멀리하면서도 무조건 멀리하지 않았으며, 잡귀를 멀리 몰아내는 의식을 치르더라도 거기에는 우리 나름의 일정한 해학과 익살이 숨어 있다. 이러한 해학과 익살이 숨어있는 우리 조상들의 벽사 의식은 여러 민속현상 중에서도 특히 마을 수호신인 '장승문화'에 잘 녹아 있다.

지역에 따라 장승·벅수·수구막이·우석목·돌하르방 등으로 불리는 장승은 마을의 제액초복과 풍농·이정표·경계표 등을 목적으로 나무나 돌에 험상궂은 사람 얼굴 모습을 새기거나 그려서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마을신앙 대상물을 말한다. 이러한 장승은 오랫동안 마을입구나 길가에서 외부사람들로부터 마을을 지키며 우리와 함께 해 왔다. 또한 무서운 병으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해 주고, 또 괴질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장승제 축문 중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은 우리 동중(洞中) 수구(守口)에서 잡귀잡신 악질을 막아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오늘 이 정성을 드렸사오니…" 라는 구절에서도 장승의 본래 임무는 마을 밖의 잡귀와 재액(災厄)을 방어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마을을 찾는 길손에게는 친절히 길을 안내해 주거나 남은 거리를 알려 주어 심신의 피로를 잊게 하였다. 또 마을과 마을 사이의 경계표가 되어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서로 만나 소식을 교환하는 '중로보기'의 장소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으며, 마을길을 고치는 공동작업인 '울력'의 경계표적 기준점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장승은 재료에 따라서 나무장승과 돌장승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만듦새를 살펴보면, 장승을 어디에 세우느냐에 따라 제작자가 다를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마을에 세우는 장승의 경우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만들고 명문을 새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 밖으로부터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잡귀잡신과 재액을 막아내기 위하여 장승의 얼굴 형상을 가능한 무사나 장군·역사·문수 따위를 흉내 내어 무섭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장승을 깎는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을 위압적으로 표현하는데 대개 실패한다. 그들은 남을 극도로 미워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지도 않은데다가 근본 성품이 사악하지 않기 때문에, 짐짓 화가 난 듯한 표정만을 어설프게 흉내 낼 뿐이다.

실제로 어떤 장승은 손자에 대한 사랑을 감춘 채 아이를 꾸지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마음씨 좋은 넉넉한 시골 노인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무심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아예 바보스런 표정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꺼벙하고 우스꽝스러운 장승도 적지 않다. 특히 경기·충청 지방의 장승은 대개 사모(紗帽)와 족두리를 쓴 신랑 각시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마을을 지켜내는 장승을 신랑과 각시로 의인화하는 발상도 모순되지만, 신랑과 각시의 모습을 무섭고 험상궂게 만드는 것은 더욱 사리에 어긋난다. 그래서 이들 장승은 잘 생긴 호남아(好男兒)와 예쁘고 얌전한 색시로 만들어진다. 장승 얼굴에 연지나 곤지를 찍기도 한다. 이런 장승을 보면 마을 사람들은 애당초 장승을 무섭게 만들려는 의지가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는 대개 퉁 방울 눈을 한 돌장승이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난다. 또한 제주지방에서는 육지와는 달리 퉁 방울 눈에 벙거지를 쓴 돌하르방이 장승을 대신하고 있어 또 다른 의미를 주고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 보이는 장승과 돌하르방 모습 역시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해학과 익살이 깃든 순박함이 한층 돋보인다.

결국 장승 모습은 마을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씨 좋은 어르신네가 마을 입구에 딱 버티고 서서 마을로 함부로 들어오는 성가신 사람들을 내쫓으려는 모습 정도로만 만들어진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장승의 무섭지 않은 표정이 마음속으로 걸렸는지, 장승에게 당당한 위엄을 부여하고 잡귀구축의 역할을 보강하기 위해 여러 명문을 몸통에 쓰거나 새겨 넣는다. 즉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쌍의 장승에는 흔히 남녀의 구분에 따라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대)장군(地下女(大)將軍)이라고 쓴다. 곧 장군이라는 신격을 부여하여 힘으로 잡귀를 제압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더하여 중심과 사방을 포함하여 오방개념이 덧붙여지고, 여기에 잡귀 구축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하여 '축귀(逐鬼)'란 낱말이 추가된다. 이들 세 가지 개념, 곧 천하·지하대장군, 오방신앙, 축귀 등이 지역과 마을에 따라서 여러 양태로 조합되면서 장승 명문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편 사찰수호를 위한 장승에는 금귀장군(禁鬼將軍), 금호장군(禁護將軍), 가람선신(伽藍善神), 외호선신(外護善神), 호법대장군(護法大將軍) 등과 같은 불교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명문이 주로 쓰인다. 이들 사찰장승 역시 입구와 사방에 세워 그 영역을 가리키거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재액을 막고자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승은 마을 공동으로 장승을 세우고 장승제를 지냄으로써 새로운 장승이 태어난다. 이때부터 장승은 신령스러운 힘을 얻게 되고 그 신성성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장승 역시 한 때 서구 문명의 수용이란 명분 아래 다른 측면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말 한반도에 첫발을 내디딘 서양인들의 각종 견문록을 살펴보면, 마을 입구에 험상궂은 사람 얼굴 모습을 하고 서 있던 장승에 대한 이야기를 흔히 접할 수 있다. 낮선 땅을 처음 밟았던 그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마을 입구에 서 있던 장승은 이상하고도 신기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80년대 사회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면서 장승에 대한 인식이 탈바꿈 하게 된다. 즉 이때부터 장승은 한국 민중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다. 이후 장승은 관광 명소나 대학가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한국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하나의 예술품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의 마을 지킴이 '장승'은 마을 신앙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신앙대상물로 비록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지만,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로써 한국 역사와 문화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전통문화라 할 수 있다.
▲ 이관호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