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악장 귀뚜라미, 제2악장 바람, 제3악장 달빛

제1악장 귀뚜라미

아침저녁이면 제법 서늘한 바람이 인다. 말하여 샛바람이라던가. 내가 여기 나와 앉아있는 뜰- 밤도 한결 소슬해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젠 완연히 가을인가 싶다.
봄 여름 가을- 이렇듯 천지자연의 공도는 어김이 없도다! 무엔가 새삼스러이 계절의 추이를 느끼며 나는 문득 귀뚜라미 소리에 젖는다. 귀뚜라미, 지금 저것들이 깃든 곳은 아마도 저 장독대의 어느 한 돌모서리거나 그 언저리에 서너 그루, 화분이 놓여있는 갈라진 시멘트 틈새이겠지. 하지만 저 하잘 것도 없는 한 치의 땅- 거기가 바로 정토요, 뿐만이 아니라, 이 천지간에 미미한 한 톨 귀꾸라미로도 청정 법신이라 하겠거니…… 내 이를 어이할 것인가.
이제, 정녕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이 되었다. 더구나 무슨 말을 하는가. 가끔 별이나 울얼으며 거저 거닐 뿐이다. 이렇듯 거닐면 된다. 내 짐짓 저반의 속루를 되뇌인들 이 밤, 가을밤을 수놓은 별들은 더욱 영롱해지기만 할 것이요, 귀뚜라미 소리는 바야흐로 적막강산에 가뜩이나 여물어 가느니, 내사 이분상의 청복(淸福)을 두고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冷眼觀人 冷耳聽語 冷淸當感 冷心思理」이것은 저 중원의 맑은 선비 홍자성의 계언이렸다. 냉(冷)자 4개를 나열, 염량세태에 처하는 길을 가리켜 주었다. 「눈을 서늘하게 하여 사람을 보고 그 선악 사정을 살필 일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곡직을 분별할 일이요, 뜻을 서늘하게 하여 느낌으로써 능히 그 이해를 판단할 일이요, 불씨를 씻고 마음을 서늘하게 하여 도리를 사려하고 그 理路를 바르게 할 일이다.」하였다.
이 가난한 뜰에 나와 영롱한 별을 울얼르는 것도 이편의 일이요, 더구나 한 톨 귀뚜라미 소리에도 잠시나마 번루 속진을 잊고 정토ㆍ법신을 일깨우는 것이 나의 멋일지니, 이 모두가 다 가을밤이 안겨준 하염없는 청복인 것이다. <이종원>


제2악장 바람
무덥고 불쾌한 긴 여름에 잔뜩 지쳐있는 나에게 어느 날 아침 그가 찾아왔다. 춤출 듯이 기뻤다. 나의 심장은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이 파랗게 맑고 높아 보였다. 마음껏 날고 싶은 하늘이었다.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 어디에나 마음대로 다닌다. 조금도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는 완전한 자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를 무척 존경하고 좋아한다. 바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지 이미 오래다.
물론 그의 형체들 중에는 하늬바람 회오리바람 허리케인 템피스트 같은 개구쟁이가 있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자만, 동남풍, 무역풍, 미풍, 훈풍 같은 착한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해탈한 성자다.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 따라 사라져 간다는 말은 구름같이 무심하게 바람처럼 애착없이란 뜻 일게다. 그는 철저한 방랑자가 되어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어떠한 일에도 아무런 미련 없이 자유자재하는 해탈의 성자이다,
그래서 가을바람은 자비의 화신이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지나는 곳에는 성숙의 환희가 물결친다. 만물은 그의 애무를 받고 열매를 맺는다. 오곡은 무르익어 황금물결이 출렁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가을바람은 사랑의 여신이다.
피부를 뚫고 뼛속에 스며드는 그의 은밀한 속삭임은 사랑의 밀어이다. 그의 보이지 않는 애무와 들리지 않는 속삭임에서 만물은 사랑을 배우고 느낀다. 누렇게 고개 숙인 벼이삭의 입맞춤, 애련한 갈대의 노래, 잔잔한 호수에 떠오르는 순이의 마알간 얼굴, 이 모두 가을바람을 사모하는 노래인 것을.
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 가을바람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손정윤>

제3악장 달빛
모시 적삼 앞섶이 도르르 말릴 무렵엔 한결 달빛이 차다. 하긴 삼복중에도 달빛아래서는 여문 땀띠조차 무색하게 마련이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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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중천에 덩실한 모습
새 하얀 구름이 소리 없이 비껴간다.
달빛이 하얗다. 희다 못해 창백하고 차디찬 모습. 어느 소복한 여인의 옆모습처럼 조용하고 청초한 표정. 투박한 살갗을 스며 마음 저 밑에까지 살며시 와 닿는다.
달빛이 드리운 속에선 너와 내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잊은 채 말이 없다. 흐르던 강물도 긴 산 그림자를 안은 채 달 아래 멎어 버린다. 풀벌레 울음소리도, 가을바람에 부벼대는 마른 잎새 소리도 달빛에 취한 듯 고요하기만 하다. 그 언제인가 이태백이 노던 달, 달을 잡으러 가다 승화해 버린 시인이지만 달보다 달빛에 더 도취된 듯하다. 나도 잊고 물도 잊고 달도 잊어버린 채 달빛에 취한 갈지자 걸음이 첨벙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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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파란 달빛이 온 누리에 가득하다. 태초의 한 모습이 이랬었던가?
우주 삼라만상이 靜에 들어 버린 듯, 그리고 그 가운데 안이비설신의 육근도 무아지경에 든 듯, 삼매지경을 맛보는 듯하다. 그러나 지극히 적적한 가운데 소소 영령한 그 하나가 맥맥히 흐르고 있다. 그러기에 너와 내가 서로 생을 달리한다해도 말없는 대화가 긴 줄을 모르리라. 구름에 살짝 가리운 달이 보시시 볼우물을 지은 채 고개를 갸우뚱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오곡이 더 여물고, 또 우리 가슴도 여물어 가고 멀리 바람결에 그 한 소식도 이만큼 아련히 다가서는가? <백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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