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까치레하게 살갗을 일깨워 놓으면 그래도 계절의 바뀜이 선명해진다.
가을! 생각만 해도 얼마나 풍성한 말이냐! 사색의 계절 조락(凋落)과 결실의 계절 모든 생물의 성장이 절정에 도달하는 시절이기도 하니 말이다.
나는 학교의 서관 3층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학교 옆 저자에는 사람들의 물결이 밀리고 밀치고 부산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왠일이냐? 분명히 나는 누구를 찾고 있지 않을까! 환상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가까이 모셨던 스승님들을 그 시정배속에서 찾고 있다니, 생각이란 날개가 돋쳤나보다. 현재나 과거나 미래에 구애 없이 제멋대로 나르고만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잠깐 과거로 나른 것이다.
그 젊은 시절 내 나이 스물이나 되었을 무렵 그 때도 가을이었다. 지금의 성탑 밑 송대 건물을 대종사님께서 손수 감역하시며 다 완성하시고 난 후였다. 우리 여학원생들 일동은 밝은 달빛을 벗삼아 송대 앞 운동장(지금의 채포장)에서 이야기와 노래로 흥겨울 때였다.
그때 대종사님께서 나오시고 우리는 층층대를 올라가 송구스런 생각에서 종사님 앞에 두 손을 모아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법문을 내리시었다.
「앞으로 우리 회상은 너희들이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크게 발전되어 참으로 좋은 세상을 너희들이 다 수용할 것이다. 그 때 아마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제가 잘나서 뭇사람들의 대우를 받고 호강하는 줄 알 것이다.」하시면서
「앞으로 얼마 아니면 이 앞이(현재 논으로 있음) 선경이 될 것이다.」하셨는데 그 때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그렇게 될 것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고 분명히 현실화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 어지간한 지방에서도 종사님께서 계시던 총부생활 못지않게 호강들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 지방뿐인가? 조그마한 기관 하나만 운영하는 사람만 되어도 옛날 선배님들을 뵈옵기 송구스러울 정도다. 선경이 된다는 말씀도 그렇다. 지금 반백년 행사의 일환책으로 정지작업이 진행 중이고 또 얼마 지나면 여러 모양의 건물이 들어설 것 아닌가?
성현들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하시더니 그 때의 대종사님의 법문이 이처럼 꼭꼭 맞아 갈 줄이야!
환상은 또 다시 머-언 서울로 날아간다. 어느 때 묵산(박창기) 선생님을 모시고 남녀동지 일행은 소풍가는 고개 길에서 산밤을 따먹으며 들은 말씀이다.
「나는 거꾸로 공부를 하고 있다. 일반적인 공부를(중, 고, 대) 먼저 배우고 도학을 나중에 배우는 그러한 공부가 아니라 도학을 먼저 배우고 일반적인 과학 공부를 나중에 배우는 특별한 공부법을 나는 택했다. 그것이 지금 와서 어찌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만일 내가 과학 공부를 먼저 했더라면 대종사님 슬하에서 그처럼 직접 만 10년간을 받들고 이 공부를 하지는 못했을 것 아닌가? 나는 먼저 종사님 재세시에 도학을 배우고 지금 앞으로 교단의 백년대계를 위해 해외 포교를 위한 공부를 여러분에게 시키고 또한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다. 두고두고 가끔가다 아슬아슬함을 느낀다.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전무후무한 이 대도회상을 만났을 때 부지런히 공부하고 대중을 위하여 노력을 하라.」하시고 「공은 개인을 희생시킬 권리가 있고 개인은 공을 위해 희생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지금도 귀에 쟁쟁한 만큼 힘차고도 귀중한 말씀이었다.
사실 선생님은 순 공심 덩어리의 용심이요 처사요 또 끝까지 공을 위해 사신 어른이시었으니까…. 그러기에 나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숱한 추억 속에서도 묵산 선생님과 공심을 빼놓을 수 가 없다.
한없이 드높고 맑은 계절 오늘도 푸르기만 한 하늘가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 
<원광종합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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