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 원칙 주의로 운용의 묘 사리지 못해
약삭빠름보다 그의 얼뜬 고지식함 좋아

나는 똑똑한 사람보다는 좀 어수룩한 사람을 좋아한다. 똑똑한 사람은 대개 경위가 분명하고 눈치가 빠르긴 해도 영악스럽고 타산적인 반면 어수룩한 사람은 세상물정에 어둡고 대인 관계가 세련미는 없지만 선량하고 순진하다. 그 때묻지 않은 순진함 때문에 종종 남에게 이용당하고 손해보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어딘가 미숙아처럼 보일 때도 있고 머리가 안 돌아서 한심스러울 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우선 내가 속거나 이용당할 염려가 없으니 경계할 필요가 없고, 그가 내 부끄러운 속을 빤히 들여다보지 못하니 어떤 결점도 들킬 염려가 없어 한결 편하다. 똑똑한 사람들한테 치여 몸둘 바가 없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세상에 그런 어수룩한 사람이 없다가는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
 불우한 성장 배경 때문에 늘 주눅이 들어 있고 자신이 없으며 소외감과 피해의식이 몸에 벤 나이기에 어딘가 만만해 보이는 어수룩한 삶을 보면 문득 눈에 생기가 돌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에는 느긋한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A씨는 그런 어수룩한 사람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다녀가는 시골, 전교가 3학급에 지나지 않는 미니 중학교에서 나는 교사, 그는 서무 직원으로 만난 것이다. 몇 사람되지도 않는 학교 사무실이었지만, 사람들은 A씨를 한결같이 경멸했다. 조소거리로 생각했다.
 그는 가벼운 사팔눈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써서 지성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좀 촌스럽고 얼뜨게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후자였다. 그는 남에게 말할 때 머릴 갸웃하고 눈을 감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도 그를 바보스럽게 보이게 했다. 남의 흠잡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의 그런 모습을 조롱하여 「6시 5분전」이란 별명을 붙였다.
 「11시 반」이 보다 정확한 묘사일텐데 굳이 「6시 5분전」이라 하는 것도 다분히 악의적이지만 그것이 보다 공감을 얻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비대한 편인 그는 땀을 많이 흘리고 그 대신 물을 많이 마셨다. 그는 무시로 냉수를 벌컥 벌컥 들이켰는데 그것도 놀림감이었다.
 그러나 A씨는 놀림감이 되는 것은 이런 어수룩한 외모보다는 그 고지식한 성행 때문이다. 그로서는 정작 진실하고 청렴했을 뿐인데 그것이 그를 융통성 없는 맹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했다. 모든 일을 원리원칙대로만 할 줄 알지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하니 나로서도 그의 돌지 않는 머리가 답답할 때가 없지 않았다.
 그에게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 웃자고 하는 소리조타 사뭇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어쩌겠는가. 그런 그를 사람들은 쪼다, 고문관, 병신이라고 놀렸다. 그래도 나는 얄밉게 되바라진 사람보다 그의 어수룩함이 좋고, 교활한 처세 가의 약삭빠름보다는 그의 얼뜬 고시직함이 사랑스러웠다.
 아직 20대였던 나에 비해 30대였던 그는 나를 지기로 상대하여 가슴을 열어 놓는 때가 종종 있었다. 하기야 그를 바보 취급하는 남들보다는 아쉬운 대로나마 대화할 상대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퍽 반가웠다. 저마다의 삶에 바쁘다 보니 거의 소식도 없이 4, 50대의 중년이 된 것이다.
 그 사이 A씨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때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겨우 서기보에서 꼬리를 갓 떼었던 그였는데, 이제는 어엿한 사무관이 돼 있었다.
 그러던 차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인물평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는 여전히 융통성 없는 사람이요 쪼다, 고문관, 병신이었다. 나는 그가 이직도 어수룩한 사람, 고지식한 사람의 탈을 벗지 못한 것에 안도하고 오히려 축하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경식<교도ㆍ도봉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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