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24}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리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다고 하나 또한 말로도 여실히 나타낼 수 있어야 하나니, 여러 사람 가운데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의 묻는 말에 대답하여 보라. 만법귀일이라 하였으니 그 하나로 돌아가는 내역을 말하여 보고 일귀하처오 하였으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가를 말하여 보라.」 대중이 차례로 대답을 올리되 인가하지 아니하시는 지라, 한 제자 일어나 절하고 여쭙기를 「대종사께서 다시 한번 저에게 물어주옵소서.」대종사 다시 그대로 물으시니, 그 제자 말하기를 「만법이 본래 완연하여 애당초에 돌아간 바가 없거늘 하나인들 어디로 돌려보낼 필요가 있겠나이까.」대종사 웃으시며 또한 말씀이 없으시니라.
 성리란 인간의 본성이요 우주만유의 근본자리이다. 그러한 경지는 부모미생전, 일념미생전, 천지미분전, 만물미생전 소식이다. 거기는 또한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진공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는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이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한 삼처전심이 하나같이 언어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들면서 『내가 녹야원으로부터 발제 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한 것은 법이란 언어문자를 떠난 경지임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백장 회해 선사가 제자들에게 『그대들 가운데 누구든지 목구멍, 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도를 일어보아라. 내가 그대들에게 도를 일러주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후일에 나의 법맥이 끊어질까 염려되노라』한 것도 역시 법을 언어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에게 한 외도가 와서 물었다. 『말하는 것도 묻지 않고 말없는 것도 묻지 않는다』
 결국 이 물음의 뜻은 말을 해서도 안되고 말이 없어도 아니 되는 방법으로 진리를 대답해 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성리의 세계는 말을 해서도 안되지만 또한 말이 없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견 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만약 작용할 때에는 몇 곳으로부터 성품이 출입합니까ㆍ』
 『태중에 있을 때에는 몸이라 하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어서는 보는 것이요, 귀에 있어서는 듣는 것이요, 코에 있어서는 냄새맡는 것이요, 입에 있어서는 말하는 것이요, 손에 있어서는 잡는 것이요, 발에 있어서는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이를 펴  놓으면 온 세계에 가득 차고 거둬들이면 조그마한 티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리는 말로써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깨친 사람은 말로써도 할 수 있고 육근동작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리문답을 하면서 똑같은 대답을 한다. 할지라도 깨친 사람의 대답은 맞고, 깨치지 못한 사람의 대답은 틀린다는 사실이다. 깨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말로써 대답을 잘 해도 결코 성리를 바르게 안 것이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리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침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친 사람의 육근동작은 그대로 성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도 나타낼 수 있고 동작으로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선가에서 방과 할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치인 것이다. 방고 할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깨치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맹방맹할이되고, 깨친 사람의 경우는 그대로 성리의 표현인 것이다.
 이 법문에서도 「만법귀일 일귀하처」가 나오는데, 소태산 대종사는 화두 중에서 만법귀일 화두에 대해서는 성리품 17장에서 설명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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