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석(白頭山石) 마도진(磨刀盡)
두만강수(豆滿江水) 음마무(飮馬無)
남아이십(男兒二十) 미평국(未平國)
후세수칭(後世誰稱) 대장부(大丈夫)」

1463년 이조 세조 13년에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토발하고, 이어서 서북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한 남이 장군의 기백이 넘치는 시조다.
남이 장군은 1441년에 태어났고, 17세에 무과 장원을 했다. 그는 겨우 20여 세에 장군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고, 27세에는 병조판서까지 되었다.
당시에 유자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조사에 있어서 대표적 간신으로 손꼽히는 자다. 유자광은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 장군을 역적으로 모함했다. 즉 위의 시조 중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어 왕에게 고자질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남이 장군은 역적으로 몰려 젊은 나이에 주살(誅殺)되고 말았다.
유자광은 그로 인해 익재 공신 1등에다가  무영군에 봉해졌다. 이후고 그는 자기보다 뛰어난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함했다. 정승 한명희도 그의 모함을 받았고, 1498년에는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은 것을 트집 잡아 연산군을 충동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이처럼 한 평생을 통하여 남을 모함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권세와 영화를 누리기에 급급하던 유자광도 1512년 중종 7년에는 마침내 모든 지위와 훈작을 빼앗기고 죄인으로 유배되어 쓸쓸히 죽어갔다.
인간 세상이란 남이 같은 사람이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가고, 유자광 같은 사람이 권세를 휘두르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느 쪽이 더 진실한 인간이고, 어떠한 세상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는 논할 필요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자광 같은 인간이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혼란하다는 사실이다.
남이나 유자광, 그들도 다 죽어서 한 줌 흙이 되고 말았다. 인간 세상의 그 시시비비의 악순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왜곡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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