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미륵리 석굴
미륵대원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세운 것으로 추측

사진>충북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에 위치한 미륵대원의 모습.

 신라는 2세기 중엽인 서기 156(아달라니사금 3)년에 소백산맥의 중간인 주흘산 뒤쪽에 계립령을 개척한다. 태백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소백산맥이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을 동서로 갈라놓고 있어서 신라와 백제의 영역을 자연스럽게 나누어주고 있는 셈이다.
 이 산맥을 옛날에는 백두대간이라 불렀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큰 줄기로 한반도의 근간이 되는 산맥이고 여타의 산맥들은 이 백두대간에서 옆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고갯길로서 처음 열리게 되는 계립령은 지금의 충주와 문경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충주의 남한강과 문경의 낙동강을 연결하는 의미도 있다.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계립령의 위치는 군사 지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거점으로 재등장한다. 후삼국이 정립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많았는데, 특히 문경과 안동 그리고 괴산 등지에서 많은 전투가 있었다. 후 고구려의 수도인 철원과의 거리를 생각할 때 중간 거점이 있어야만 증원군 투입이 신속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거점으로 계립령 일대가 가장 적지였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궁예는 왕건의 수훈으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통솔력의 한계로 결국 왕건에게 후 고구려의 대권이 넘어가면서 고려가 건국된다. 이때 왕건은 자가의 주요거점이었던 계립령에 큰절을 세우게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대원은 금당을 석실로 꾸미고 있다. 전실과 지붕만을 목조로 하였을 뿐 주실은 삼면 벽을 석벽으로 하였고 이 석벽에는 많은 불감이 있어서 불상들을 조성하였고, 중심에는 거대한 미륵불(보물 96호)을 모시고 있다.
 주위에서 발굴된 기왓장 중에서 미륵 당이라 쓰여진 것들이 상당량 출토되고 있어서 이 금당의 명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실은 북향하여 월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지형상 북향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위치를 선정한 것이 특이하다. 석실을 꾸민 석재들은 상당히 거대한 크기들로 20여톤을 넘는 것들이 많다.
 이 미륵당은 어느 때인지 모르나 화재를 당하였던 모양이다. 석재의 표면들이 화상을 입어 많이 파손된 상태이고, 본존불상도 손상된 부분을 다시 손질하였던 모양으로 약간 위축된 모습이다. 화재는 고려말 몽고 군이 침입하여 방화한 것으로 보인다.
 석실 전면으로는 여러 건물 지와 함께 석등, 오층석탑(보물 95호), 돌 거북, 당간지주 등이 남아있다. 석탑의 기단 석은 본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돌 거북이나 석등도 같은 방법이어서 이채롭다.
 석탑과 석등은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돌 거북은 원래 비석의 받침돌로 쓰이는 형상인데 비석은 간 곳이 없고 비석을 세웠을 자리도 일반적인 형상과는 다르다. 당간지주는 상당히 큰 편으로 중간이 부러져 있으나 윗 부분에 연꽃이 새겨져 있는 고급스러운 모습이다.
<서울청운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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