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권 강의
중간리드 = 방편이 비록 실체가 아니지만 방편을 놓고 실체에 들어가지 못한다.

중생들은 실상반야나 관조반야를 놓고 문자반야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근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거기에 안주하지 못한다.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분별이 아닌 지혜로, 일시적이 아니라 오래오래 계속 해야 한다. 마음의 광명을 가지고 계속해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반야에는 실상반야, 관조반야, 문자반야의 세 가지가 있다. 실상반야는 내 마음의 본바탕인데 그것은 중생과 부처가 다름이 없다. 관조반야는 마음의 바탕을 통해서 비춰주는 마음의 광명이다. 문자반야는 광명을 통해서 시비흑백을 따져 가는 방편이다.
중생들은 실상반야나 관조반야를 놓고 문자반야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근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거기에 안주하지 못한다.
방편이 비록 실재가 아니지만, 방편을 떠나서는 실상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실상에 들어갈 때까지는 방편이 필요하지만 들어간 다음에는 놓아버려야 한다. 강을 건널 때까지 배가 필요한 것이지 건너간 다음에는 배를 놓아버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상에 들어간 다음에는 방편을 놓고 그 실상을 통해서 내가 활용하는 방편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즉 반야심경이 내 마음으로 들어와야지 내가 반야심경 속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육근을 통해서 그대로 활용되는 실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색수상행식 즉 몸과 마음이 다 공(空)한 것이다. 그렇지만 중생은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사람의 육신은 마음의 감옥이다. 육신이라는 감옥에 들어가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중생의 세계다.
육신이라는 감옥에 얽매어 사는 마음의 자세를 다시 전환해서 그 육신을 자기가 활용하는 도구로 삼아버리면 바로 부처의 세계가 전개된다.
오온이 다 공한 것임을 비춰보아야 하지만, 그 공이 본래 허망하기만 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 공은 거울과 같은 진공이다. 거울의 본바탕은 아무 것도 없지만, 삼라만상이 지나면 삼라만상이 비치고, 산이나 물이나, 사람이 이와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한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거울과 같지 못하다. 지나고 나서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남아있기 때문에 시비흑백이 나오고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거울 같은 진공이기 때문에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마음을 비추어 보면 온갖 모습이 나타나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런 자취가 없다. 본래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있지만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온이 공한 줄을 알고, 오온을 진공자리에 비추어 본다면 일체 고뇌를 벗어나게 된다.
인간이 태어난 이상 고뇌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이는 「나」라는 관념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오온이 공한 것을 알고 보면 자기의 심신이 공한 자리를 비추어서 일체의 고뇌가 다 멸도 되는 것이다. 마음이 정화된 그 세계가 바로 부처의 세계요 반야바라밀다인 것이다. 오온이 공한 것임을 본래 자리에 비추어 본다는 것은 일순간만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에 걸쳐야 한다.
그러나 각자의 마음 가운데 오온개공의 진리를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나」라는 실체가 뚜렷이 있기 때문에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또한 공부해 가는 재미도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 고액>이다. 자신을 진공실상 자리에 비추어 보고 거기에서 살되, 지난 다음에는 자취가 없이 살아야 한다.
바람이 지난 다음에는 대나무에 소리가 남지 않고 기러기가 지난 다음에는 못 위에 그림자가 없다는 채근담의 가르침과 같이, 자기 마음속에 그림자를 남겨서는 안 된다.
진리의 광명과 자성의 광명이 합치될 때, 시방일가 사생일신의 큰 진리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입으로 호언장담할 지라도 진리와 자기가 따로 따로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진리를 그대로 여실히 봐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온개공이라 해서 육신이 헛것이요 분별심도 헛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장님이 길을 갈 때, 가운데의 큰길을 모르고 왼편이나 오른편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는 비유가 있다.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고만 주장하면 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눈앞의 것이 다 현실이라고만 주장한다면 현실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유무를 초월하면서 유무를 총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온개공은 허망이 아니라 진공실상인 것을 알아야 하고 거울같이 비추어 환하게 다 나타나지만 지나고 나면 깨끗이 사라지듯이 심신을 동작해야 하는 것이다.
우주대자연의 체성이 진공이고, 그 자리에 자성을 비추어 볼뿐만 아닐, 내 자성의 본래자리를 바로 진공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리자>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를 불러 청법대중의 정신을 진작시키고 나서 다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상이 진공과 다르지 않고, 진공이 또한 색상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형상 있는 모든 색상은 진공실상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즉 삼라만상이 모두 진공실상의 체성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관상이 다 진공의 체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치 얼음과 물처럼 공과 색이 다르지 않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바로 진공실상이요, 공이 바로 색상인 그 자리를 바로 그대로 보아야 한다. 삼라만상은 진공실상의 화현이요 즉 처처불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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