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산 김광선 선생
<약력>
○ 1879년 9월 6일 전남 영광 백수에서 탄생.
○ 원기 3년 6월 7일 출가.
○ 원기 13년 총부 서무부 서기.
○ 원기 14년 총부 감원.
○ 원기 15년 진안 교무.
○ 원기 16년 영산 서무부장.
○ 원기 22년 총부 순교무.
○ 원기 22년 11월 13일 열반.
○ 교단 봉직 22년
○… 모든 일에 나태하고 정성이 부족하여 공부하는 데에도 태만하고 보면 그 하는 일에 성공을 보기가 어렵나니라.
○…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공중사를 하러 나온 우리로서는 매사를 빈틈없이 처리하고 근검절약으로써 이 공부 이 사업에 온 힘을 다 바쳐야 한다.
○… 공중금액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니 각별히 명심하여 취사하여야 한다.
○… 죽어서나 살아서나 이 교단과 대중에게 조금 치라도 폐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
○… 정당한 일을 한 번 하기로 하였으면 어떠한 역경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굽히지 않고 굳굳히 이겨나가야 한다.
○… 영겁에 만나기 어려운 대종사님 법 만났을 때 쓸데없는 사심 내지 말고 공부 사업에 전력을 다하여 영생을 개척할 준비를 하여야겠다.
○… 천하사를 하려고 나온 우리 전무출신들은 영육쌍전과 이사병행의 공부를 실행하여 만생령을 제도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겠다.
생애
팔산 선생님은 유시부터 대종사님과 의형제를 맺으신 같은 마을인 길용리 출신이시다.
선생님은 일찍이 한문사숙을 마치신 비범한 어른이시었으며 특히 용단성이 특수하시어 한 번 심중에 하시기로 한 일은 끝까지 이루어내는 성미 시었다.
대종사님 입정 당시 모든 사람들이 폐인이라 비평 조소를 할 때 팔산님은 대종사님의 뜻을 짐작하고 정신적인 위안과 경제적인 협조를 많이 하였다.
남달리 기력이 장하시고 한학에도 그 실력이 뛰어났으며 대종사님보다 12년이나 연상이었지만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이루신 후에는 의형제의 결연을 고치고 제자가 되었다.
정법을 배우기로 맹세한 후에는 공부에 방해되는 복잡한 세간 사를 정리하고 90세 되신 노모님과 어린 4남매에게 약간의 재산을 남겨놓고는 창립 당시 방언공사에 가산을 바치셨다.
그 당시 방언공사에 대한 타인의 조소가 심했으나 거기에 조금도 굽힘이 없이 일단 정신을 다 바쳤고, 밀려오는 조수에 쌓은 둑이 무너지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조수 속으로 뛰어들어 몸으로 언을 막기도 하셨다.
이 교단과 이 동지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몸은 추호도 아끼실 줄 모르시던 어론,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생명을 내던지시려던 보살 팔산 선생님! 그리하여 백지의 혈인을 나투신 거룩한 교단의 선생님!
총부 건설 당시 전무출신들의 생활이 곤란하여 엿장사를 할 때 책임자로서 온갖 고생을 하셨지만 여기에 일호의 사심이나 불만이 없으셨고, 동지들이지만 사사로이는 엿밥 하나 맛볼 수 없게 엄격하셨다.
열반 당시 「내가 다행히 회복이 되어 공부에 활동하게 되면 어려운 교당 유지비에 보조할 계획이었는데 이제 더 있지 못하게 되니 공중을 위하여 처리하여 주십시오.」하고 그 동안 동지들이 조금씩 드린 돈 20원을 정산법사님 손에 쥐어주셨다. 그리고는 「부디 건강한 몸으로 공사에 노력하십시오.」하시면서 동지들에게 최후 인사를 한 후 말없이 원적의 길을 떠나셨다.
▼ 16호에 나간 공산 송혜환 선생님 열반 당시 법위는 정식법강항마위였습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