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이운권 강의

경계를 피하려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그 경계를 요리하려는 마음이 확고하게 서야 한다. 그런 다면 이 세계가 나의 활동 무대가 된다.
外不放入하고 內不放出을 謂之坐요
바깥경계가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안 마음이 바깥경계로 나가지도 않는 것을 좌라 하고-
결국인간은 경계 가운데 일 가운데 살게 되며 일과 경계를 피해서는 살 수 없다. 만일 밖의 모든 인연이 쉬었다(外息諸緣)고 해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면 이러한 사람은 우주 밖에서는 살 수 있을지 모르나 이 지구 안에서 살지는 못할 것이다.
천만외경이 있으나 내 마음을 놓아도 외경이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외불방입이며 모든 경계를 활용은 할지언정 경계에 내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경지이다.
내불방입이란 안으로 내 마음을 턱 놓아도 일심이 되어 밖으로 흩어지지 아니함을 말한다. 이것이 곧 청지불문하고 시지불견인 것이니 이러한 표준을 좌라고 일컫는다.
無着無依하야 常光現前을 謂之禪이며
주착하는 데도 없고 의지하는 데도 없어서 떳떳한 광명이 앞에 나타나는 것을 선이라 하고-
우리는 활동을 할 때 한편에 치우치려는 생활을 하기 쉽다. 중생은 부처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의지하려는 생활이 한 걸음 나아가게 되면 착심이 된다. 그래서 내 암을 볼 대 착심도 없고 또는 의지하려는 생각도 없어서 초롱초롱한 자성의 광명이 내 앞에 거울과 같이 나타나 있는 것을 선이라 한다.
우리는 동정간에 선의 세계를 표준 잡을 때 자기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즉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세계 자기가 옳다고 인정하는 그 세계를 벗어나야 만이 참으로 큰 선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만일 자기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선을 한다면 결국 그 세계만을 확충시킬 뿐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남을 헤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듣고 보고 배운 바의 지견을 해치려는 데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일반도 마찬가지다.
결국 인간은 각자의 세계를 벗어나서 선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널리 봐야하고 마음 가운데 구애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구애는 제2의 천성이다. 선은 이 천성을 개조하자는 것이며 개조치 않고 수행할 때는 길이 달라지게 됨은 물론이다.
外?不動하고 中寂不搖를 謂之坐요
외경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중심이 적적하여 요동하지 않는 것을 좌라 이르고-
내 마음이 삿대면 조달이가 진을 치고 유인하나 마음이 삿대지 않고 중심이 선 사람은 좌우에 호법신장이 진을 치고 두호해 준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므로 경계를 무서워하고 피하려 하지 말고 그 경계를 요리하려는 마음이 확고하게 서야 한다. 그런다면 이 천지가 나의 활동무대가 될 것이요 중심이 서지 못하면 오늘날 현란한 과학문명 속에서 걸어가지 어려운 것은 말할 나위 없다.
廻光返照하야 撤法根源을 謂之禪이며
밖으로 쏠리는 정신 빛을 돌이켜 비쳐서 자성 본원에 사무치고 있는 것을 선이라 하고-
수행하는 사람은 항상 자성을 반조하여 마음의 고향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고향을 떠나서 오욕에 허덕이고 사는 사람은 불쌍한 고아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고아이면서도 불쌍한 줄 모르는 사람은 더욱 불쌍한 것이다. 이러한 신세를 면하려거던 회광반조해야 한다. 한 일 두 일 일의 유무를 불구하고 반조하고 반조해서 모든 법의 근원을 투철히 알아야 한다.
법이란 모든 경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경계의 근원 즉 죄와 복, 순과 역의 근원을 확실히 아는 것 이것이 현실 사회를 요리하는 첩경이다.
경계의 근원을 파악하는 원동력은 내 자성의 근원을 반조하는 것이요, 바로 근원을 반조하는 것이요, 바로 선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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