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강발표 50주년을 맞으며
성인이 나시기 전에는 진리가 천지에 있고
성인들이 가신 뒤에는 진리가 그 경전에 있다.
교사편찬 교학 수립이
당면한 과제로 남아.

금년은 개교 반백년 성업 완성의 해다. 사회적으로는 70년대의 이미지가 크게 부각되고 있고, 교단적으로는 반백년 성업 완성의 해이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교단의 장래를 전개해 가야 할 시기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백년 성업이라는 너무나 큰 「이슈」 때문에 자칫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것은 금년이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를 중심으로 한 교강을 발표한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라는 사실이다.
한 종단이 형성되려면 교조, 교리, 교단이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교리의 형성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교단에 있어서는 교조이신 대종사님 당대에 교리가 확립되었고 교서까지 발간된 점은 크게 자랑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년이 반백년 성업 완성의 해임을 잠시라도 잊어선 안 되지만 또한 교강 발표 50주년임을 기억하면서 교서발전사를 더듬어 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 초기 교서
원기 원년 3월 26일 대종사님께서 일원의 진리를 깨치신 후, 그 해 5월에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 등의 최초법어를 설하시었다.
원기 5년 부안 봉래산 실상사에서 사은사요, 삼학팔조의 교강을 초안 발표하시고 원기 12년 3월에 「불법연구회 취지규약」을 인쇄 발표하였다.
원기 17년 3월에 비로소 「육대요령」을 발행하게 되었으니, 이 「육대강령」은 교리의 강령을 6장으로 요약하여 밝힌 본교 최초의 기본경전이다.
그 내용을 보면 제1장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 제2장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 제3장 훈련편, 제4장 학력고시편, 제5장 학력등급편, 제6장 사업고시편 등 제6장으로 이루어져 교서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에서 1장은 사은사요, 2장은 삼학팔조로 발전했다. 3장 훈련편은 정기훈련 상시훈련의 토대가 되었고, 4장 학력고시편은 수양, 연구, 취사로 나뉘어 원만한 인격형성을 도모했다. 5장 학위등급편은 법위등급이 되었고, 6장 사업고시편은 사업성적의 모체가 되었다.
「육대요령」은 현재의 「정전」과 약간의 차이짐이 있다. 우선 형식상의 차이점에서 본다면
① 사요의 표현이 남녀권리동일, 지우차별, 무자녀자 타자녀교육, 공도헌신자 이부사지라고 되어 있다.
② 삼학팔조를 삼강령 팔조목으로 표현되어 있다.
③ 정기훈련 11과목 중 「상시일기」가 없고 「수시설교」조항이 들어있다.
④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이 「공부인이 교무부에 와서 하는 책임」으로 되어있다.
2. 불교 정전
육대요령 이후 원기 20년에 「조선불교 혁신론」과 「예전」이 나왔다. 조선불교 혁신론은 현재 대종경 서품에 그 듯이 요약 수록되어 있고, 예전은 현재 예전의 모체가 되었다.
원기 25년에 초고를 시작한 「불교정전」이 28년에 발행되어, 「원불교 교전」이 나온 47년까지 근본경전으로 사용되었다.
대종사께서 불교정전을 발행하시면서 유시하시기를 「너무 급하게 서둘러 약간의 미비한 점이 있는 것 같으나 나의 한 평생 포부와 경륜이 여기에 다 수록되어 있으니 기 교법을 받드는데 조금도 소홀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불교정전은 대종사님께서 28년간 대중을 교화하신 교리내용과 모든 사상을 강령적으로 밝혀놓으셨던 것이다.
종교발전사에 있어서 교조 당대에 교리를 완성 발표한 일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용을 보면 원기 24년까지 발행한 모든 인쇄물과 프린트 물을 종합하여 요약 분류한 제1권과 참고경전인 제2, 제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이 순수한 우리 경전인데, 제1편 개선론 제2편 교의편 제3편 수행편으로 되어있는데, 개선론은 조선불교 혁신론이 중심이 되었고, 제2, 3편은 현재의 정전과 거의 같게 되어있다.
그러나 제1권도 현재의 교전과 약간 다른 점이었다. 일원상 편에서 역사적 고증을 위해서 일원상의 유래가 밝혀져 있다. 사대강령은 정각정행, 지은보은, 불교보급, 무아봉공으로 되었다. 참회문에서는 조사들의 글귀가 많이 인용되어있다.
제2, 제3권은 금강경, 반야심경, 사십이장경, 죄복보응경, 현자오복덕경, 업보차별경, 수심결, 목우십도송, 휴휴암좌선문 등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원기 54년 「불조요경」으로 발간되었다.
불교정전이 편수되기까지에는 원산 서대원 선생, 정산종사· 주산종사, 구타원 대봉도님 등이 큰 역할을 했고 대종사님께서 최종 감수하시었다.
3. 원불교 교전
현재의 원불교교전이 발행되기는 원기 47년 9월이었다. 이 교전은 대종사님께서 불교정전을 낼 때에 시일이 급하여 만전을 기하지 못했으니 재판을 낼 때에는 다시 더 손을 보라고 하신 말씀을 받들어 불교정전의 제1부인 정전과 대종사님의 언행록인 대종경으로 구성되었다.
편수과정을 보면 원기 38년 5월 수위단회의 결정으로 정산종사를 총재로, 대산종법사, 구타원님을 지도위원으로, 당시의 수위단 전원을 자문위원으로, 이공전씨를 전문위원으로 한 대종경 편수위원회가 발족되었다.
43년 5월에 정화사가 발족하여 이공전씨가 사무장으로 취임하면서 사무인계를 받아 본격적으로 편수작업이 진행되었다.
정화사는 대종경 편수뿐만 아니라 정전의 어휘수정과 재판작업을 아울러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기 47년 1월에 최종 원고가 완성되었으나 정산종법사의 열반으로 중단되었다가, 7월에 가셔야 최종감수를 끝내고 9월 29일에 드디어 정전, 대종경 합간판이 「원불교교전」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탄생된 것이다.
이해 10월 7일에 교전간행 봉고 및 경축식을 가졌는데, 당시 대산종법사님은 다음과 같은 봉찬식 법문을 발표했다.
「성인이 나시기 전에는 진리가 천지에 있고 성인들이 가신 뒤에는 진리가 그 경전에 있다고 한 옛말이 있습니다.
실로 경전은 모든 진리의 결집된 바로서, 우리들의 마음의 등불이며 전 인류의 태양이 되어 영원한 앞날에 중생의 혜복문로를 열어놓은 것이니, 이와 같이 소중한 경전의 간행은 가장 거룩한 사업이며, 삼계 중생이 다 같이 축복할 경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 우리의 교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역대 어느 경전과도 비할 바가 아니어서 앞으로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하여 일체중생이 다 함께 제도를 받으며 혜복의 길을 열어주고도 남음이 있을 희유한 대법보입니다.
이 세계가 넓고 넓으나 대소유무의 이치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인간의 일이 복잡다난하나, 시비이해의 일에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이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을 남김없이 밝혀놓으신 것이 바로 이 한 권의 교전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가나 정치가나 문학가나 철학자나 실업가를 막론하고, 이 한 권의 교전에 의하여 하나의 큰 진리를 연마하고 해득하고 실행해 간다면 복혜의 길은 자연히 열릴 것입니다.
그런 즉 우리 동지들은 시방삼계 육도 사생과 함께 이 교전의 발간을 환히 경축하는 동시에 이 공부 이 사업에 더욱 힘써서 이 법은이 무량세계 무량중생에게 고루 비치도록 전하는 데에 함께 힘써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4. 원불교 예전
원기 11년 2월에 대종사님께서 「신정의례」를 발표하셨고, 20년 8월에 「예전」이 발행되었다.
정산종사께서 이를 기초로 하여 원기 37년에 프린트판 예전을 발표했고, 다시 이를 토대로 하여 정화사에서 원기 53년 3월에 성가와 합간판으로 원불교 예전, 성가가 우리의 교서로서 발간되었다.
이 예전은 대종사님께서 크게 강조하신 예법의 시대화, 대중화, 간소화를 근본정신으로 하여 편찬된 것이다.
5. 맺는말
교학수립의 문제
반백년의 교단사를 통하여 교전, 불조요경, 예전, 성가 등의 교서가 이미 발간되었다. 다른 종단의 발전사에 비교해 볼 때 매우 눈부신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교단은 다른 종단과는 비교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반백년 성업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의미 지워질 수 있겠으나, 우리 교단의 비약적 발전을 기약하는 의미도 크게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창건사를 중심한 교사와 교학수립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직도 불교 교리와 명백히 구별되지 않는 점이 있다. 원불교학이 학문으로서 구성되지 못한 것도 매우 아쉬운 일이다. 지방 교리강습이 원불교 교리강습이라기 보다 불교 교리강좌 같은 인상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심각한 문제다.
반백년 기념성업이 다분히 형식적 작업이라면, 이제 그 내용적 작업인 교학수립이 중대한 문제로 등장한다.
사람이 죽어가고 행사는 변천되어도 교학은 수립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교강 발표 50주년의 의미를 우리가 되새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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