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창립의 얼 따라 ⑧

구간도실
 대종사는 임시방언사무소를 범현동 제각보다 현장에서 가까운 강변주점으로 옮겼으나 방 하나를 빌린 이곳 역시 대종사와 그의 제자들의 집회장소로는 너무도 협착하였다. 동년 10월, 그들은 마침내 옥녀봉 아래에 구간의 도실을 기공하여 12월에 준공하니 이 구간 도실이 우리 회상 최초의 도장이다.
 어느 결에 가을이 가고 살을 에는 한파가 휘몰아쳤으나 새회상 창설자로서의 사명감에 흙 지게를 지고 있는 그들에게 하늬바람은 오히려 청신한 하늘의 입김이었다. 밤이면 장작불에 데워진 구간도실 온돌방에서 대종사의 법설에 귀를 기울이는 그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법열과 보람으로 한낮의 피로를 잊었다.
 다음 해인 1919년(원기4년) 3월 방언공사는 만 1년 만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의 위대한 개척정신과 영육쌍전의 산 표본으로 감격 어린 방언공사를 준공한 대종사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시켜야 할 새회상의 창설자로서 천의를 감동시킬 특별 기도를 시작하였다. 3월 26일부터 매월 6일, 16일, 26일 밤이면 중앙봉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산봉에 10시에서 12시까지 촛불이 밝혀졌다. 7월 16일 밤, 구간도실에서 대종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세계 인류를 위해서라면 정녕 죽어도 일호의 여한이 없겠는가. 나의 말이나 동지들에게 대한 체면을 떠나서 냉정히 생각해 보라고 말하였다. 돌연 9인의 표정은 비장해졌다. 제자들은 이구동음으로 사무여한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7월 26일을 희생일로 정하고 나날이 간절한 치제를 계속하였다.
 7월 26일 밤 8시, 9인제자의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들은 대종사를 만나게 된 것을 그러기에 한낱 필부의 미몽에서 깨어나 참된 자아를 깨닫게 되고 대세계의 이상을 갖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드리게 되었다. 그러기에 다만 정신개벽으로 인한 낙원 세계를 염원하는 기도일념 뿐이었다. 朝聞道 夕死可矣의 심경에서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청수를 올린 제상위에 아홉 개의 단도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무여한이라는 최후증서에 아홉 개의 백지장이 찍혀졌다. 伏地心告로 기도식을 마치고 대종사 최후증서를 펼쳐보니 백지장이 혈인으로 나타났다. 순간 그들의 심경은 차라리 무표정한 극단의 황홀경이었다.
 이 회후 증서는 燒火로 告天되었다.
 9인 제자는 각자의 기도봉을 향하여 구간도실을 출발하였다. 이들의 늠름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대종사가 큰 소리로 제자들을 불렀다. 그들은 다시 구간도실에 모였다. 『제군들의 마음은 이미 하늘을 감동시켰다. 우리의 새회상은 백지혈인으로 법계의 인가를 받게 되었다.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제군의 몸은 십방세계에 바친 몸이니 오늘의 지공무사한 이 마음으로 이 공부 이 사업에 전무하며 길이 중생제도에 노력하라』고 말하였다.
 이에 11시가 지나니 9인 제자는 대종사의 명에 의하여 중앙봉에서 합동기도를 마치고 구간도실로 돌아오니, 대종사 그의 제자들에게 법명과 법호를 내려주면서 『제군의 지난날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며 개인적인 사명이었다. 그 이름을 가진 자는 이미 죽었다. 이제 세계 공명인 새 이름을 주니 앞으로 많은 중생을 제도하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새회상 성직자로서의 事務出身精神이 비롯되었다. 10월 6일로 법인기도를 마치고 이후 불생불감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가르치게 되었다. 교역자 정신의 산실인 구간도실 집터는 지금 聖域으로 보존되고 있고, 건물은 원기8년 8월 현 영산선원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바로잡음>
102호 4면 「개벽의 여명」 중, 방언공사를 가로채려던 부호 김덕일은 김원영으로 바로 잡습니다. 김덕일은 방언공사의 돈을 빌려준 부호였고, 김원영은 당시에 병사한 것이 아니라 6 ㆍ 25이후에 별세했다고 합니다.
<교무부편수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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