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와 여기

 종교란 흔히 저기 저 먼 곳, 저 높은 곳을 향한 생활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종교는 여기 이곳이 너무나 괴롭고 너무나 어지럽고 추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열린 생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저기를 저 높은 하늘에 그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기를 저 먼 사방정토에 그리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많은 사람들은 저기를 먼 훗날, 죽음을 거쳐서 그 다음에 올 어느 날에 열리는 그곳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여간 이 이 현실과는 다른 어떤 초현실적인 생이 열리는 그곳을 사람들은 저기 가야할 곳, 가고 싶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종교는 여기 이곳의 생활에 혐오를 느낀 사람들의 것이 되었고, 종교는 저 먼 곳을 쳐다보며 한숨짓는 센티멘탈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되었고, 종교는 또한 지금 이 시간보다도 저 영원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마치 여기와 저기는 완전히 격리된 별개의 것이기나 한 것처럼…….
 인생이 조금도 괴롭지 않고 더럽게 보이지도 않으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도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도무지 아무 소용도 없는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다. 또 설사 인생이 괴롭고 두려우며 무언가 해결해야 될 것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제 힘으로 해결하려고 이를 악 물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종교의 매력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에 의존하려고 들 것일까?
 책략과 힘과 돈과 그것을 적절히 안배시켜가는 노력이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 될 것이다. 모든 죄의 화근을 그것으로써 대신 지불하고, 그 과보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당장에 그 자리의 화만을 모면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써 성공했다고 믿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도 종교를 안 가진 사람도 사고방식이 이쯤 되면 사실은 어느 편도 잘했다고는 말하기 곤란한 것이다. 사실은 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요한 것이며, 죽은 뒤의 내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나는 불교를 차라리 종교라고는 규정짓지 않는 편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본질은 저기 먼 곳을 여기 이곳에서 발견하고 여기 이곳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으며, 죽은 뒤의 행복보다는 살아있는 이 현실 속에서 고통과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자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또 그 고통스럽고 불행한 현실을 행복한 현실로 바꾸는 善方便의 실천이 사실은 불교의 근본 교훈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몸 하나 안에서, 내 집안에서, 내 사회생활 속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고통과 불행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 자신 때문에 생겨난 고통도 있고 남들의 탓으로 생겨난 불행도 있다.
 돌발적인 것도 있고 숙명적인 것도 있다. 참고 조심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앞질러 잘못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고 精勤만 했더라면 없어질 수 있는 불행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바로 행복의 궁전이 있는데, 난장판을 만들고 말았지 않은가? 아파트가 왜 무너지는가? 어쩌자고 이 아름다운 산천에 자기 배만 채우려는 장사치들은 세계에서도 제일 추한 벽돌 하꼬방들을 다닥다닥 붙여 짓고 있는 것인가? 불교는 먼저 마음의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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