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도 극락도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②
풍요한 물질 ㆍ 풍요한 정신
마음의 풍요는 정신적 진보에서
마음의 빈곤은 자살적 행위
빈곤한 정신은 남에게 당황을 줘

 현대사회는 자칫하면 $ 본위로 환산해서 좋다거나 나쁘다고 한다. 참된 觀賞이 못된다. 어딘지 마음이 쏠려 「좋구나」하고 생각하였지만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기분이 어딘가 마음속에 있기에 안다. 그것도 그 자가 다섯을 아는 힘이라면 다섯을 아는 셈이다. 백의 힘이 있으면 백가지를 안다. 50인의 세계와 100인의 세계에서는 같은 것을 알고 있다지만 내용이 다르다.
 예를 들어, 학업성적이 50명 중 1등과 100명 중의 1등은 질적으로 다르다. 보는 눈의 척도가 있기 때문이다. 수용태세가 틀리다.
 이것은 정신면에서 보아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는 최고로 보았지만 잠깐만 반성하고 타인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인간이어야 한다. 겸허하게 경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겸손하게 듣고 역시나 하고 납득하는 것이 정신면에 서 있는 사람이며 타인이 뭐라 한들 들어주지 않는 것은 정신면의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귀를 기울였다는 것뿐이다. 또는 「이것은 내가 한 것이다」「내가, 내가……」하는 자는 물질적인 자아의 상징이다. 정신을 풍요하게 누림으로써 남의 말을 겸허히 듣고 받아들여 납득한 연후라면 실수도 없으며 남에게 당황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정신적 진보란?
 30년쯤 됐다. 필자가 중학교 4학년, 서울 수학여행 때의 어느 늦은 봄의 일이다. 비좁은 전차 속에서 모시로 소복단장한 장바구니를 가진 중년부인이 뒤에서 「좀 비켜 주실 수 없을까요?」했다. 그 여인은 영어문법에서의 Will과 Shall 용법을 아는, 말하자면 여고를 나온 여자가 아니면 전문학교나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내 마음에도 날씬한 키에 이지적인 그 모습이 어딘지 우아하고 교양 있는 기품이 있어 뒤따라가 대화를 나누고 싶어 망설이던 중 그 연인과 지금의 아현시장 앞에서 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그 여인은 나의 구원의 연인상으로 지금도 환영을 더듬어 왔다. 이것이 나의 청춘방랑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의사를 묻는 Will의 용법을 구사하던 여인의 겸손은 나이 어린 나에게도 존어를, 말하자면 Will이 아닌 Would you like to make some room for me? 이런 Sporken  English에서 온 우리말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순간도 가슴이 뛴다. 「좀 비켜주셔요!」 Please make some roon for me 이런 명령조가 아니었다. 「비켜 주실 수 없을 가요?」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의사에 맡기려는 그것은 전적으로 상대방(남성)에 대한 강력한 보호의식에서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정신적 진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 시내버스를 탔다. 자기는 서 있다. 「야, 지겹다.」고 생각할 때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서기에 바로 앉았다. 그것은 자기 앞이라서 앉기가 손쉬웠다. 그러나 그때 일어서는 사람이 서 있는 사람에게 「자, 앉으세요.」한마디 말이 있었다면 굉장히 고맙게 여기며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권총과 권총이 맞붙었다. 한쪽 사람이 「빵!」쏘면 버티고 있는 상대방은 쓰러지면서도 반동적으로 「빵!」쏘아 두 사람은 다 같이 목숨을 잃고 만다. 상대방이 쏠 때 잠시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가 이쪽에서 쏘는 것이 승법일 것이다. 버스에서 앉았던 자가 일어서기가 무섭게 앉아버린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자살적 행위이다. 교양 있거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앉았던 사람이 내릴 때 서 있는 사람에게 「자, 앉으세요, 덕택이었습니다.」 말한다면 「괜찮습니다.」양보를 하든지 「감사합니다.」고 인사가 오고 가는 것은 좌석을 넘겨준 자의 풍요한 마음에서, 그리고 앉게 된 사람도 마음의 흐뭇함에서 나온 인사일 것이다.
 그런데도 「시내버스를 탈 바에야 다 같이 30원 냈는데 못 앉으면 바보다」라는 빈곤한 마음씨라면 제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라 할지라도 그 사회는 풍요한 사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무덥고 비좁은 여름 아침, 출근 버스에 탔다. 월요일은 일간지가 없는 날이어서 창밖에서 내민 스포츠 신문을 한 장 사서 굵은 활자만 대강 읽고 옆자리에 있는 손님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그 손님은 기다리고 있듯이 고맙게 받아 꼼꼼히 읽고 있었다. 이때처럼 10원짜리 신문 한 장이 얼마나 존중히 쓰여졌는가 하고 유쾌한 출근시간을 겪었던 생각이 나기도 한다.
 어느 봄날이었던가, 한낮에 한 학부형과 같이 눈길이 아직 덜 녹은 효자동 아스팔트길을 걸으면서 어느 집 담 너머로 뻗어난 하얀 목련이 몇 송이 봉오리 져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백목련은 꽃이 먼저 피고, 잎이 핍니다. 자목련은 잎이 피고 꽃이 피지만…… 저 꽃이 만발하면 향기가 은은합니다. 라일락보다 강하지요.』라고 중얼거렸더니,
 『김교수님은 돈만 있으면 참 멋있게 살 분입니다.』라고 감명 깊게 말을 건네받았다. 그 뒤 또 어느 날 밤, 다시 그 부형과 남산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저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 줄기와 이 밤의 저 초생달, 그리고 이 맑은 밤하늘과 저 뭇 별들을 내일의 당신 생일에 선사합니다.』하고 말하자 둘이서 즐겁게 웃던 적이 있다. 그뿐인가. 지난주에는 부산에서 마지막 고속버스를 탔다. 모처럼 초생달이 아스러히 머리위에 비치고 있었다. 그 부산의 초생달과 서울까지 동행하려고 눈여겼던 그 달은 터미널을 벗어나 어느 만큼 왔을 때 그만 흐린 밤하늘에 놓쳐 버려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끝내고, 마음에 풍요함을 느낀 다는 것은 정신적 진보에서 일 것이다. 정신면에서 한가롭고 포근해질 마음의 풍요함을 감득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이나 자신에게도 원만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평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마음의 평화를 간직할 때에 풍요한 인간, 풍요한 사회로 이루어질 것이며 한 회사의 경영면에 있어서도 전과는 다른 점이 일어날 것이다.
 여유 있는 작업태도에서 제품은 더욱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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