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진 잡초 속의 새싹
불의를 본체만체 할 수 있을까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이북에서 혼자 나와 서울거리를 돌아다니던 어느 일요일,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는 건물 속으로 나도 끼어 들어갔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6 ㆍ 25전란 때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를 통하여 신부님께 소개되었고 그 후에는 그 신부님으로부터 일정기간의 교리공부 끝에 영세를 받았다. 그때 제일 신통한 것은 묵주신공이었다. 이는 성모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나는 부모 없이 혼자 허덕이던 때였으므로 항상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역경에 처했을 때 성모님은 내 길을 가리켜 주셨다. 수없이 받은 은혜 가운데서 하나만 적는다.
 고학을 하던 어느 때의 일이다. 학기말 시험 때면 밤에 일하여 하루하루 먹을 수 있었던 일을 중단하고 시험에만 전력을 다했다. 시험이 끝난 어느 날, 교정의 숲속에 들어가 누워 묵주신공을 드리다 배가 고프고 피로하여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만큼 잤을까. 누가 깨우기에 눈을 떠보니 몇 년 만에 경상도 시골에서 나를 찾아 온 친구가 아닌가.
 그 친구는 내가 다니던 학교에 와 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어디서 나를 찾나 걱정하면서 숲속에 잠시 앉아있노라니 옆에 사람이 누워 있는데 내가 틀림없음을 알고 반가움에 나를 깨웠다는 것이다. 그 시골에서 올라온 모처럼의 친구가 하필 그 큰 학교의 숲속에서 나를 만난 것은 신비로운 성모님의 자비라고 우리는 밤새 이야기 했다.
 나는 이렇게 신비한 힘까지를 빌려서라도 나의 단한번의 생을 잘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믿는 예수께서 제일 매력 있는 부분은 그의 「죽음」이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항거하며 생명을 바쳤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압박 받는 사람들 편에 섰다. 예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셨다. 평등해야 되는 인간사회 관계가 수직관계에 있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한 집단이 또 다른 집단을 누르는 죄의 세계를 개조하러 예수는 오셨다. 나는 천국을 그릴 때마다 이런 생각과 그림을 그려본다. 『어느 곳에 한 섬이 있는데 그곳으로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섬의 주인을 찾아달라고 하니, 한 사람이 섬 위에는 개개인이 다 주인이오. 무슨 용무인지 나에게 이야기하시오.』하는 사회. 이것이 수평적인 사회요, 아버지가 뜻하는 사회가 아닐까.
 수직관계의 사회, 불의의 사회를 수평의 사회, 정의의 사회로 개조하기 위하여 예수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조직과 제도 속으로 들어가라』하였다. 집에 불이 붙었는데 외치고만 있느니보다 집에 뛰어 들어가 불 끄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직접 사회제도 속에 뛰어 들어가 소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잡초 속에서나마 자라고 있는 새싹」「썩어가는 고기 덩어리의 방부제로서의 소금」이라고 비유하였다. 이렇게 제도 속에서 개혁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세례요한」에 대한 말로 알 수 있다. 『요한은 이 인간세상에서는 제일 큰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나라로 가면 아마도 제일 작은 사람이 될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부정한다. 이기심을 버리는 자기부정.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아버지, 저를 이렇게 아픔을 당하도록 버려두지 마시옵소서.』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상의 죄인들을 위하여 죽어야 된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조용히 죽었다. 아픔을 느낀 것은 자기 자신을 아낀 탓이다. 그러나 자기 육신의 아픔이 아버지의 뜻과 충돌되는 경우 아버지의 뜻을 앞세워 자기의 삶도 부정한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교회와 신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회는 그가 이 사회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치 사회가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처럼 망상 속에서 사회의 악과 불의를 본체만체 외면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몇 년 전, 미국의 천주교 성직자들은 인종차별, 베트남전쟁 등에 대하여 동조적 혹은 외면하는 정책에 항거하다가 즐겁게 투옥된 일이 있다. 조용한 수도원을 떠나 버림받은 저소득층인들이나 범죄 많은 곳에 직접 나가서 그들과 함께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교회 예산의 3분의 2 이상을 저소득층의 자녀교육에 쓰도록 하는 운동도 전개돼가고 있다. 얼만 전 신문보도에도 생계를 위해 노력하는 버스 차장들의 밤 학교에 무료봉사 해줄 것을 자원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소식에 감명 깊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그들 대학생 가운데 종교 신자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 그들이야말로 우거진 잡초속의 새싹들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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