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삶에는 연습이 없다고 한다. 같은 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과정에서 보면 어떤 때는 실수가 허용도고 반복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은 중요한 결과를 좌우하는 결정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간의 생활은 가능성이라는 교육적 견지에서 실수가 허용되고 너그러움과 격려 속에 <바로잡음>의 기회가 함께 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일선 교화에 서서 있는 지금은 그런 너그러움이 주어지질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망망한 바다에서 배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선장의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책임을 느끼기도 한다.
교육과 문화의 깊이가 서울 못지않은 부임지에서 교역자라는 말이 뜻하는 「교화하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는 한없는 부족을 느끼게 된다. 마치 연습이 부족한 선수가 시합장에 나서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을 음미해보면서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모시고 배우는 사람으로서 성실하려고 마음 다져본다.
성(誠)은 「참됨」과 「꾸준함」이다. 이제 나의 생활은 「참」에 대조하면서 위선은 경계하고 정성심으로 게으름을 꾸짖어 볼 것이다.
교화자는 숱한 관계를 맺는 속에서 살기 마련이다. 그 관계의 모체는 몸과 입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일선 교화의 첫 발을 딛고 임지의 지명을 풀어본다.
마음에 덕을 심고 행동에 덕을 심고, 말에 덕을 심어 심덕과 행덕과 언덕의 삼덕을 쌓아보도록 채찍질 하란 뜻이 아닌가.
오늘 내가 있기까지 「너의 스승은 내가 되고 나의 스승은 너희가 된다.」(변의품 20장)는 말처럼 서로가 스승 삼아 노력하면서 서로가 자신이 큰 목적을 달성하는데 보탬이 될 스승이 되어야겠다.
<「덕청(德靑)」10호에서 가려 뽑음. 편집자 주>
<교무·삼덕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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