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당을 잃은 지 30여 년…… 그 통한의 세월을 말하는 개성교도들
수양원 건립 위해 옷감 보따리 행상
어려운 피난 시절에도 개성교당 재건 잊은 적 없고
수복 후 서울서 모여 법회 본 것이 종로교당의...

교당을 잃은 지 30여 년…… 그 통한의 세월을 말하는 개성교도들
수양원 건립 위해 옷감 보따리 행상
어려운 피난 시절에도 개성교당 재건 잊은 적 없고
수복 후 서울서 모여 법회 본 것이 종로교당의 초석
당시 30대의 꿈 많던 금강 청년단원들 이제는 60대
개척교당에는 손길 안 닿는데 없고 4명이 교도회장

○… 종로교당은 4월 30일 창립 제22주년 기념법회를 열고 종로교당 창립의 초석이 되었던 개성교당 교도 27명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졌다.
6· 25 사변으로 육신의 고향과 마음의 고향을 함께 잃은 개성교도들은 어려운 피난시절에도 개성교당의 재건을 잊은 적이 없었으나 38선이 막히어 개성으로 돌아갈 수 없자 함께 모여 법회를 보았다. 이것이 종로교당의 시작이었다. 또 개성교도들은 여러 개척교당의 중인이 되었다.
이날 간담회에서 털어놓은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한다. <편집자 주> …○
박진신(현 구로교도) 당시 개성교당 금강청년단 부회장은 당시의 청년활동 중 청년회의 기금조성을 위해 『인분과 소변을 모아 팔고, 설거지물(구정물)도 팔았다.』고 먼저 말문을  연다.
그때만 해도 화학비료가 귀했으므로 인분은 다시없는 거름이었다. 따라서 인분 수거비란 생각도 못했고 지주들은 오히려 돈을 주고 사 가는 형편이었단다. 『개성의 인분 장사는 ×맛(?)을 보고 값을 흥정할 정도라.』는 악평이 떠돌 만큼 개성인의 억척 근성은 알아주는 세상이었다고 한다.
『아마 그 때 인분 1통 값이 1전이었을 것이라.』고 눈을 깜박이며 기억을 되새기는 이영수(현 청파 교도회장)님의 얼굴엔 깊은 주름살 속에 분단국가의 쓰린 아픔만큼이나 인분장사로 이룬 개성교당을 버린 통한이 서린다.
『약간의 기금이 모이자 직조기를 구입 베 짜기를 했죠. 그 때 박성경(현 서울교당 교감)님이 고생 많이 했죠. 겨울이면 언 손을 부벼 가며 「실」에 풀을 먹이는 작업이란……』 그러나 『베를 짜고 개성 명물인 백삼(白蔘)을 깎던 당시 30세 전후의 청년 단원들의 노역은 수양원을 세운 뿌듯한 보람의 세월이었다.』고 감회가 젖는다. 직물 판매는 송달준님(현 총부에서 출가교역에 임하고 있음)이 전담, 판매 루트는 주로 이리 전주 신태인 방면이었다고. 『개성에서 완행열차를 타는 지루함이 차라리 수양원 건립의 꿈으로 부분 가슴에는 보따리 행상길이 오히려 신바람 나는 세월』이었단다.
그런 신바람 나는 세월도 이경순 교무가 초량으로 전근하고 부교무이던 이순석님이 교무로 시무하던 해에 6· 25 동란이 터졌다고. 『절벽강산에 무너지는 가슴이란 형언키 어렵더라.』고 망연한 표정을 짓는 조진숙님은 『낮이면 폭격기의 기총소사로 마당에 탄피가 그득 하였다.』고 술회한다.
공산당은 B 29가 무서워 저녁에 모내기와 방공호를 파는 등 노력 동원을 강요하는 형편이었다고 『비행기 소리만 나면 이불 속에 머리를 쳐 박고(?) 엉덩이는 하늘을 보는 희극도 연출했다.』는 회상담에는 모두들 소담한 웃음을 까르르 쏟아놓는 이 실향 교도들. 그리고 이제는 할머니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금강 청년들.
이미 노동당에 접수되어버린 교당은 송달준님과 이순석 교무님이 지키는 암담한 세월이었고. 공산당원들은 교당을 「원불(圓佛)사(寺)」라고 불렀으며 『각종 교당 집기를 탈취해가기 위해 30여 회나 노동당원들이 들락거렸지만, 오히려 수양원을 건립하여 노약자를 보호하는 자선사업 단체를 핍박하는 것은 인민공화국 헌법에 저촉되는 행위라고 윽박질러 쫓아 보냈다.』고 회상하는 송달준님의 초롱초롱한 기억력엔 공산 치하의 고난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른 호법 정신의 면모가 엿볼일 듯도 하다.
밤에는 이윤광 교도 집에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총부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단다.
그런 악몽의 3개월이 지나고 9· 28 수복 이후 곧장 남하 총부로 부산으로 교도들은 제각기 피난길을 떠났다고 한다.
피난지의 분망한 생업 중에서도 마음속에는 항상 개성교당을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던 이들 27명은 시국이 안정되자 피난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양형선 교도 집에서 법회를 보기에 이르렀고 그 단결의 결정이 오늘날 종로교당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다졌던 것이다.
30대의 개성 청년단, 그러나 이제 60을 넘기고 더러는 70 나이에 이른 이들 피난민들의 각고의 세월 그 세월의 뒤안길엔 벌써 유명을 달리한 교도가 두 분.
얼마큼은 세월의 무상함도 알았으련만 지금도 교당 창립과 전국 각지의 개척교당에는 이들 「개성」피난 교도들이 끼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것은 어쩌면 개성토박이의 억척 기질(?)과 피난민의 망향심이 신앙심으로 뭉쳐진 활력 아닐까?
지금도 이들은 70 노구를 사양 않고 각 교당 교도회장단으로 4명씩이나 활동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또한 억척으로 수양하고 믿음으로 다진 적공은 법사 1인과 전무출신의 대열에도 두 분이 끼였고, 세월은 흐르고 남은 것은 늙음 뿐이지만 『원불교 만나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는 미수복지 개성교당의 「금강 청년」들은 『이제 남은 바램이 있다면 교조 정신이 흐려지지 않는 교단 되기만을 빌 뿐이라고』.
말을 맺는 27명 「개성」교도들을 보면 양형선 김묘영 고혜림화 왕새명 이천륜 손상인화 박흥시원 김선인 이윤정 박진신 김여일화 우시진화 최행덕 최인수 조진숙 양정본행 백수정(구례교무) 최원각 이춘택 김윤근 임도근화 이정화 김주연화 홍인덕 정명진화 이영수 송달준.
<밝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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