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양말업을 하면서 남편을 원망했던 일이며 빚으로 2남 1녀의 자녀들을 공부 시켰던 일이 주마등간이 스쳐 지나간다.
특히, 1977년은 내인생에 있어서 최대 고비였다. 동대문에서 신림동으로 양말공장을 이전 확장했으나 수출길이 막혀 은행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고 설살가상으로 남편의 술과 잡기로 인해 사업은 점점 기울어져만 갔다.
삼성그룹 하청도 받고 진양이라는 우리 상표로도 양말을 생산했지만 남편과 돈 문제로 공연히 사업을 확장했다는 후회감이 들었고 급기야는 말로만 들었던 신경쇠약증에 걸리게 되었다.
나는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고종 시누이가 운영하는 흑석동 두칠암에 요양하러 갔다. 3개월 요양하니 어느정도 회복은 된듯했으나 어느때는 버스를 탔어도 정신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해 내려야 할 장소를 지나칠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화곡교당에 다니는 사촌언니(이안갑, 60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갈 곳은 원불교다. 절에 가려면 거리나 시간상으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원불교는 곳곳에 있다. 네가 살고 있는 신림동에도 있을 것이다. 찾아 보도록 해라』
나는 사촌언니의 권유로 몇주일을 벼르다 찾게 된 신림교당에서 원기66년 7월, 김지영 교무님(현 이리수양원 원장)의 연원으로 입교를 했다.
나는 신림교당을 다니면서 원망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나의 건강도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동대문으로 이사를 오면서 사실상 동장의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런 후 원기69년 약사인 큰 딸(강여진, 35세)과 함께 성남으로 이사, 현대까지 약국을 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무경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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